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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고려 Korea] 코리아를 세계에 알리다

by 제이노엘 2016.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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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입니다.



지난번에 이어 또 영어를 써봅니다.


고려 KOREA.


우리나라가 왜 영어로 Korea가 된 것인지,


아니면 Corea 가 맞는 것인지 궁금해왔습니다. ㅋㅋㅋ



먼저 고려는 건국 이래로 외국인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용한 나라였습니다.


송나라와의 무역을 활발히 했을 뿐만 아니라 거란족, 여진족 등과도 많은 교류를 하는 개방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지요.





특히 세 차례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후, 고려는 송과 활발히 접촉했습니다.


사신, 학자, 승려들을 송에 보내 발달한 선진 문화를 받아들였지요.


고려는 송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문화나 각종 제도 등 경제, 문화적 이익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송은 고려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군사력의 약점을 보완하고 군사적 도움을 얻으려고 했지요.


송은 고려와 교류함으로써 위협을 주던 거란족이나 여진족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가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진 것도 고려의 이러한 대외 개방 정책 때문입니다.


고려에 찾아온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고려라는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지요.


고려는 여러 나라와 교류하면서 온건책과 강경책을 적절히 활용하여 국가의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의 조작과 침략에 의해서 Corea가 Korea로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그건 맞지 않다고 합니다.


서양 언어의 계통을 따져볼 때 라틴 어 계열의 프랑스에서는 ‘ㅋ’을 ‘C’로 표기하고,


독일어의 영향을 받은 언어에서는 ‘K’로 표기한다고 합니다.


두 가지가 혼용되어 쓰이다가 영국 왕립지리학회와 미국 국무성의 결정으로 ‘Korea’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C보다는 K가 발음이나 철자법상 혼돈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려가 수도로 정한 개경의 옛 이름은 송악으로 풍수지리가 뛰어난 곳이었습니다.


왕건에게는 고향이며, 상업 활동의 기반이자, 정치 활동의 토대가 된 곳이지요.


당시 개경의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같은 시기의 이탈리아 피렌체의 인구가 10만 명이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진짜 큰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았을까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상업이 발달했지요.


당시 개경에는 상점들이 즐비해서 비가 오는 날에는 상점의 처마 밑으로만 다녀도 비를 맞지 않을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외국인들로 항상 북적였던 개경, 이곳에는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사신을 위한 숙박 시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온 외국 상인들을 위한 숙박 시설도 많았지요.


이슬람교를 믿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들어와 집단으로 생활하기도 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외국인이 찾아왔으면 이런 시설들이 만들어졌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연등회나 팔관회와 같은 국가적인 행사에 공식적으로 초청을 받아 참석하여 고려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지요.


당시 개경은 세계를 향해서 열려 있었던 개방적인 국제 도시였습니다.


지금 개경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남짓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지요.


천 년 전 외국인들도 쉽게 드나들었다는 이곳을 우리는 언제쯤 자유롭게 가 볼 수 있을까요? ㅜㅜ




벽란도는 예성강 하구에 있었던 항구의 이름입니다.


예성강은 수심이 깊고 수도인 개경과 가까워서 해상 교통이 발달하기에 좋은 곳이었지요.


외국 상인들은 가지고 온 물건 중 가장 좋은 것은 왕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시장에 팔았어. 이 물건을 사고, 다양한 물건을 팔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벽란도에는 큰 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 안의 각종 세금과 특산물도 이곳 벽란도를 통해서 개경으로 운반됐지요.


오늘날 서해 바다에서는 침몰한 당시의 배가 가끔씩 발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배에 실려 있던 고려 청자같은 물건들이 갯벌 속에 파묻혀 파손되지 않고 있다가 발견되는 거지요.




국어 사전에 깍쟁이는 이기적이고 인색한 사람, 얄미울 정도로 약빠른 사람이라고 써 있습니다.


그런데 이 깍쟁이라는 말은 원래 고려 때 개성의 상인들을 부르던 말이었다고 합니다.


장사 잘하기로 유명한 개성 상인을 송상이라고 하는데, ‘가게쟁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가게쟁이가 변해서 깍쟁이가 되었지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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