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무시당하던 '언문'의 아름다움… 詩로 지어 널리 알렸대요
정철과 윤선도
지난 9일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는 '한글날'이었죠.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사용하라며 만들어졌지만 조선시대에는 양반들로부터 '상스러운 글자'라는 뜻의 '언문(諺文)', 여자들이나 쓰는 글자라는 뜻으로 '암글'로 불리며 무시당했어요. 그런데 조선 중기 정치적으로 매우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한글 문학을 지은 두 인물이 있었답니다. 바로 송강 정철(1536~1593)과 고산 윤선도(1587~1671)입니다.
◇임금을 그리워하며 쓴 '사미인곡'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 되오리다/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고 다니다가/향기가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조선 14대 왕인 선조 때인 1588년 송강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思美人曲)'이라는 한글 가사(歌辭) 중 일부예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창평으로 물러나서 지은 작품으로,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을 남편과 이별한 여인의 그리움에 빗대서 표현했어요.
정철은 13대 왕인 명종 때인 1562년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올랐고 선비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맞설 때 서인의 편에 섰어요. 나중에는 서인의 우두머리가 되어 동인 세력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유배 가기를 되풀이했지요. 정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지었던 때도 그가 예조판서와 대사헌 등 높은 벼슬을 지내다 동인의 탄핵을 받고 사직한 뒤 지방에서 지낼 때였습니다.
'사미인곡'을 지은 이듬해인 1589년, 정철은 다시 선조 임금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갔고 이후 선조의 묵인 아래 수많은 동인을 처형했어요. 그러다 1591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건의한 일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또다시 관직에서 쫓겨나고 말았죠. 이후 서인 세력은 힘을 크게 잃게 되었고요.
당시 동인 세력은 정철을 어느 정도로 처벌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 다툼이 일어났는데요.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북인', 유배를 보내는 수준으로 마무리하자는 '남인'으로 다시 나뉘었답니다. 결국 정철은 유배를 갔다가 임진왜란 때 다시 관직에 올랐고, 이후 동인의 요구로 사직한 뒤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부사시사, 오우가를 지은 윤선도
당시 서인과 맞섰던 남인 중에서도 정철처럼 강력하게 당쟁에 나서며 남인 세력을 이끌던 인물이 있었어요.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 때부터 제18대 왕 현종 때까지 활약한 고산 윤선도입니다.
윤선도는 1587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부에서 태어났지만 전라남도 해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1612년 과거에 급제했고 이후 의금부도사 등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사직하고 한동안 해남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다 1628년 41세 때 당시 왕자였던 봉림대군을 가르치는 '왕자사부'가 되어 3년 동안 가르쳤는데, 이 봉림대군이 조선 제17대 왕이 된 효종입니다.
"나의 벗이 몇인가 헤아려보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이 밝게 떠오르니 그것은 더욱 반가운 일이로다"
윤선도가 55세 때인 1642년 해남에 머물 때 지은 '오우가(五友歌)'라는 한글 시조 중 일부예요. 윤선도는 해남에서 지내며 많은 한글 시조를 작품으로 남겼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우가'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꼽아요.
윤선도는 당시 서인의 우두머리인 송시열과 다양한 논쟁을 벌이며 맞섰는데요. 1659년 효종이 죽자 효종의 어머니뻘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조정이 갈라졌어요. 이를 '예송 논쟁'이라 하는데 서인은 1년을, 남인은 3년을 주장했지요. 효종의 아들인 현종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서인의 주장에 따랐어요. 윤선도는 이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상소를 올리며 적극적으로 송시열과 서인을 공격했지만 결국 탄핵을 당해 유배를 가게 됐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72세였어요. 8년의 귀양살이 끝에 그는 결국 해남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정철과 윤선도는 조선 중기 당쟁이 극심했을 때 당파의 우두머리로 상대를 날카롭게 공격하는 거물 정치인이었어요. 하지만 한글 가사와 시조에서 빼어난 작품을 남기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었고 그 결과 한글 문학사에 뛰어난 발자취를 남겼답니다. 거물급 사대부인 두 사람이 굳이 한글로 글을 쓴 이유에 대해서는 임금과 백성들 모두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리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나와요.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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