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백성을 힘들게 하지 마소서"… 고려 성종에게 올린 28개 충언
최승로의 '시무 28조'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한 평범한 30대 가장이 부동산·경제 정책 등의 문제에 대해 진언한 상소 형식의 '시무 7조'를 올려 주목을 받았어요. 시무 7조는 통일신라 때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건의한 '시무(時務) 십여조'와 그의 증손 최승로가 고려 6대 임금 성종 때 올린 '시무 28조' 등에서 제목을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시무 십여조'는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아 구체적인 조항을 알 수 없다고 해요. 내용이 전해지는 시무 28조는 '28가지 시급한 일'이라는 뜻이죠. 어떤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던 글일까요?
◇임금에게 올린 28개 충고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좋은 생각을 적어 밀봉해서 올리시오."
서기 981년, 새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에 있는 5품 이상 신하들에게 '숙제'를 냈어요. 글을 밀봉하라고 한 것은 임금만 뜯어보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앞서 고려 4대 임금 광종은 왕권 강화의 길을 걸었으나 호족 세력을 누르면서 공포정치를 펼쳤고, 그 아들인 5대 경종은 호족 세력의 반발로 정치적 불안을 겪어야 했어요. 경종의 사촌동생인 성종이 왕위에 오른 시기는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다시 나라의 기틀을 잡아야 할 때였지요. 하지만 적장자(정실 왕비의 맏아들) 출신도 아니었고, 즉위 때 스물두 살에 지나지 않았던 성종에겐 뛰어난 신하들의 조언이 절실했을 거예요.
이런 성종에게 '시무 28조'를 올린 인물이 종2품 인사 담당 요직에 있던 최승로(927~989)였습니다. 최승로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로 유명해 열두 살 때 태조 왕건 앞에 불려가 '논어'를 줄줄 읽었다고 해요. 감명받은 태조는 말과 곡식 등을 하사하며 총애했다고 합니다.
◇"백성의 삶을 돌보소서!"
오늘날 '시무 28조' 중 6조(23~28조)는 전해지지 않고 1~22조만 전해집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
<1조> 요충지에서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에게 국방을 맡길 것, <2조> 많은 불교 행사로 백성의 고혈을 짜내지 말 것, <3조> 궁궐 경호원 숫자를 줄일 것, <4조> 임금이 작은 은혜에 집착하지 말 것, <5조> 중국과 비공식 무역을 금지할 것, <6조> 절 재산으로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할 것, <7조> 지방관을 둘 것, <8조> 승려가 마음대로 궁궐에 출입하지 못하게 할 것, <9조> 조회 때 관료 복식을 옛 제도에 따라 할 것, <10조> 승려가 객관에 묵으며 행패 부리지 못하게 할 것, <11조> 풍속을 반드시 중국과 같게 할 필요는 없음, <12조> 섬의 공물과 요역을 공평하게 할 것, <13조> 연등회와 팔관회로 백성을 많이 동원하고 노역이 심하니 줄일 것, <14조> 임금은 교만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공손하게 대하며 죄지은 자는 법에 따라 처벌할 것, <15조> 궁궐의 노비와 말 숫자를 줄일 것, <16조> 지방에서 절을 짓는 데 백성을 동원하지 말 것, <17조> 부자들의 큰 집은 제도에 맞지 않으면 헐어버릴 것, <18조> 신라 말 불경·불상에 금과 은을 쓰는 지나친 사치가 멸망의 원인이 됐는데 요즘도 그런 일이 있으니 금지할 것, <19조> 공신의 등급에 따라 자손을 등용할 것, <20조> 불교는 다음 생, 유교는 지금을 위한 것이니 유교를 행할 것, <21조> 산천에 지내는 제사 비용이 백성에게서 나오니 금지할 것, <22조> 과거 노비와 주인이었던 사람들 사이의 소송을 판결할 때 분명히 할 것.
◇성종의 정책에 많은 영향 미쳐
'시무 28조'는 성종을 감복시켰고, 이후 성종의 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종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중앙 조직을 2성 6부로 개편했고 지방관을 파견했어요. 다만 '불교 국가'라는 고려의 정체성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시무 28조'의 일부는 음서제(귀족 자손을 시험 없이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19조) 등 귀족에 유리한 내용도 담고 있어 비판받기도 해요. 하지만 '민생을 돌보라'는 핵심 메시지만큼은 분명했고 이는 실제 정책에 반영됐답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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