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에세이] 18세기 해적 선장 바살러뮤가 만들어… 제1조는 "약탈물은 똑같이 나눈다"래요
해적 법전
2007년 개봉한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세상의 끝에서'를 보면 해적 두목끼리 다툼을 벌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 가리자며 육중한 '해적 법전(The Pirate Code)'을 참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해적들이 이 법전 내용을 바탕으로 재판까지 벌인답니다.
영화에서나 나오는 허구일 것 같은 이 '해적 법전'은 실제로 존재했어요. 영화 속 '해적 법전'은 '바살러뮤의 법전'을 딴 것이랍니다. 영국 서부 웨일스 출신 바살러뮤 로버츠(1682~1722)는 18세기 해적 전성시대에 활약했던 대표적 해적 선장입니다. 뛰어난 항해술과 엄격한 리더십으로 이름을 떨쳤던 사람이에요. 그는 실제로 해적 법전을 만들어 사용했고, 1724년 발간된 찰스 존슨의 '해적의 역사'라는 책에 그 원문이 전해지고 있지요.
예를 들어 해적 법전 제1조는 모든 해적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똑같이 한 표씩 행사할 수 있고 약탈한 물건을 나눌 때도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제2조는 동료 것을 훔치면 안 된다, 제3조는 돈을 걸고 하는 도박은 금지한다, 제4조는 저녁 8시 모든 불을 끄고 잠들어야 한다, 제6조는 여자나 아이를 데려와선 안 된다, 제8조는 서로 싸우면 안 된다, 제9조는 해적질을 하다가 부상당하거나 불구가 된 사람은 공공 기금에서 위로금이나 보험금을 탈 수 있다 등의 내용이에요. 아직 유럽에 시민혁명의 불꽃이 번지기 전인 18세기 초 민주주의와 공동 분배, 사회보장까지 담고 있는 법전을 만들었다니 신기하게 느껴져요.
이렇게 해적 법전이 평등을 강조하는 건 기본적으로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달아나거나 쫓겨난 선원이 해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같아요. 더구나 일사불란하게 상선을 공격하고 약탈하려면 역할을 나누어 협력하는 일이 필수적이었죠. 그러다 보니 일방적 명령보다는 이익 배분을 동기로 일종의 협약을 맺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었답니다. 새로 해적이 되는 사람들도 성경, 총, 칼, 대포 등에 손을 얹고 이 문서를 읽으면서 맹세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해적 법전은 해적들 사이에서 소속감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현재 남아있는 해적 법전들은 체포된 해적들의 재판 과정에서 남겨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대략 9가지의 해적 법전 원문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어요. 물론 이런 법전이 남아 있다고 해서 해적들이 이걸 다 지켰다거나, 정말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살아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범죄를 잘 저지르고자 내부적으로 단속한 것일 뿐이니까요.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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