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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선생님

[법학 에세이] 정나라 재상 자산, 황제의 권위 상징하는 '쇠솥'에 형법 새겨 널리 알렸대요

by 제이노엘 2020.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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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 에세이] 정나라 재상 자산, 황제의 권위 상징하는 '쇠솥'에 형법 새겨 널리 알렸대요

 

춘추전국시대의 법치주의

▲   /위키피디아

권력자와 특권층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 만든 것이 법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법은 오히려 권력이 함부로 사용되는 것을 막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방패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귀족들은 오히려 법이 만들어지고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방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국에서 여러 나라가 경쟁하던 춘추전국시대. 정나라의 재상이던 자산(子産)〈사진〉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형법을 널리 알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형법의 내용을 새긴 쇠솥, '형정(刑鼎)'을 만들어 보급했죠. 기원전 6세기쯤의 일인데 당시 솥은 황제의 권위가 미치는 천하를 뜻했어요. 일부 학자는 이를 중국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보기도 해요.

귀족들은 자산의 정책에 크게 반발했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백성들이 법을 알면 이를 악용해 법을 어기고 다툼만 늘어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마음은 법의 내용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 형법이 강력한 힘을 갖게 돼 자신들의 특권이 줄어들게 되니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산은 귀족들의 끊임없는 반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자산과 동시대에 비슷한 이유로 법을 보급하려 노력했던 정나라 학자 등석(鄧析)의 고통도 매우 컸습니다. 뛰어난 말솜씨를 가진 등석은 논리적인 주장을 펼쳐서 돈을 받고 소송을 맡는 오늘날의 변호사와 비슷한 일을 했는데요. 그는 사람들이 법을 잘 몰라서 뜻하지 않게 법을 어기고 불이익을 받는 일을 안타깝게 여겼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학교를 세워 사람들에게 법을 가르쳤답니다.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글을 적는 데 사용했던 대나무 조각(죽간)에 형법 내용을 적은 '죽형(竹刑)'이라는 형법책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습니다. '형정'보다는 조금 늦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등석은 사람들에게 법의 내용을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직접 사건을 맡아 부자나 귀족들의 잘못된 주장에 맞서 대신 반박해주는 일까지 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미움을 더욱 많이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사람들을 선동해서 송사를 일으키는 것을 일삼고 국정을 문란하게 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지요. 백성들에게 법을 알려준 죄였던 셈이에요. 당시 재상을 맡고 있었던 자산은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던 등석의 사형을 결정해야 했어요.

정나라 귀족들과는 달리, 진나라는 법이 가지고 있는 힘을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법가(法家)의 사상을 받아들였는데요. 대표적인 법가 사상가로는 상앙, 한비자, 이사 등이 있죠. 덕분에 진나라는 빠른 속도로 강대국이 되었고 진시황은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기원전 3세기 중국을 통일하고 거대한 땅을 통치하게 되었답니다. 대나무 조각에 하나씩 새긴 법의 정신들이 모여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나라'라는 현대 중국의 거대한 뿌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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