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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강감찬] 귀주에서 거란족을 물리친 장군

by 제이노엘 2016.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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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입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귀주대첩 강감찬, 서희 거란족.


네, 간단 명료하게, 강감찬 장군님에 대해 알아봅시다.



강감찬 장군님은 뭐 간단하게, 948~1031년까지 살았던 고려 초기의 장군으로


현종 9년(1018)에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쳐들어왔을 때, 상원수가 되어 흥화진에서 적군을 물리쳤고,


다음해에는 후퇴하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귀주 대첩이라고 하는게 뭔지는 몰라도 들어는 봤을 정도인 것이지요.



하지만 가만히 있을 거란이 아니지요.


거란은 우리나라와 늘 대립적인 부족이었지요.


국가는 아니기에 거란족이라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ㅋㅋ


아무튼, 1018년 12월 거란은 다시 소배압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습니다.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서 20만 대군을 동원했지요.


거란군은 틈만 나면 개경을 공격했고, 이를 지키기 위해 고려군은 죽을 힘을 다했죠.


강감찬은 소가죽을 연결해서 흥화진 동쪽 상류의 물을 막고 1만 2천 명의 군대를 숨겨두었습니다.


이를 모르는 거란군은 강을 건너다 강감찬이 터뜨린 둑의 물살에 휩쓸려 내려갔고 그나마 이를 피한 거란군도 고려군에 전멸됐지요.


이 전투가 흥화진 전투입니다. 엄청 간단하게 요약했지요? ㅋㅋ



그리고 다음해인, 1019년 1월, 흥화진 전투 패배 이후 거란은 개경 근처 100리 밖 신은현까지 진격해 왔습니다.


현종은 개경 근처 백성들에게 식량을 가지고 모두 성 안으로 피신하여 성문을 지키라고 명을 내렸지요.


적군의 식량 보급을 끊어서 굶주림과 피로에 지치게 하려는 전술인 것이지요.


결국 추운 날씨에 지친 소배압은 후퇴를 결정했고, 강감찬은 그들을 기습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2월에는 귀주에서 도망갈 곳이 없는 거란군을 좁은 계곡으로 유인하여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삼면에서 한꺼번에 공격했습니다.


거센 바람이 거란군 쪽을 향해 불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화살을 퍼부었지요.


이때 거란의 10만 대군 중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2천 여 명뿐이었다고 전해지며, 이 전투를 귀주 대첩이라고 우리는 알고있습니다.




귀주 대첩 당시 강감찬 장군의 나이는 71세였다고 합니다.


노장이지요,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황충같은 그런 백전노장.


강감찬 장군이 태어나던 날 장군의 집에 큰 별이 떨어져서 그 집을 낙성대라고 부릅니다.


서울에 있는 그 낙성대이지요.


또한, 강감찬 장군은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이기도 하지요.


거란의 1차 침입 때에도 거란족에게 항복하려는 신하들 앞에서 열렬히 반대 의견을 내 놓았고,


또 재상의 자리에 올랐을 때에 송나라 사신이 강감찬에게 큰 절을 하며,


“문곡성(밤 하늘의 별자리의 하나)이 오래도록 보이지 않더니 여기 계셨군요.”


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고려는 세 차례에 걸친 거란족의 침입을 모두 막아냈지요.


비록 그 후 거란은 고려를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지만 매번 국경선에서 막아내지 못하고,


개경 근처까지 진격하도록 함으로써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고려는 이후에 있을지 모르는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국방 강화에 힘썼지요.



1033년 덕종은 국경 부근을 안정시키기 위해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까지 연결하는 돌 장성을 쌓도록 했습니다.


중국의 만리 장성처럼 원래 있던 성과 성을 모두 연결하여 외적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지요.



압록강 입구에서 위원, 흥화, 정주, 영해, 영덕, 영삭, 운주, 안수, 청새, 평로, 영원, 정융, 맹주, 삭주 등


13개 성을 거쳐 요덕, 정변, 화주 등의 성지에 이르는 대략 천 리에 달하는 긴 성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천리 장성’이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물론 일부에서는 잦은 전쟁과 병충해 등으로 인해 흉년을 겪는 농민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성을 쌓는 데 부역을 시키는 것은 안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1044년까지 모두 12년간의 공사 기간을 통해 만들어진, 높이와 두께는 각각 25척이나 되는 견고한 성이라 합니다.


이 장성은 고구려에 이어서 우리나라 역사에 두 번째로 만들어진 것으로,


천리 장성의 유적은 북한의 곳곳에 남아 있는데, 통일되면 볼 수 있겠지요? ㅋㅋ




거란이 물러났으나, 왕이 살고 있는 수도 개경 주변의 방비는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수도들은 궁궐을 둘러싼 주변에는 내성을 쌓아서 평상시 생활의 중심지로 이용하고,


외곽에는 외성을 쌓아서 적이 침입했을 때 전투의 중심지로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개경에는 내성은 있지만 외성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불안하게 여긴 강감찬은 개경에 나성, 즉 외성을 쌓을 것을 건의했지요.


그래서 이가도라는 사람을 총책임자로 하여 축조된 나성은 1029년 완공되었고, 그 둘레는 약 60여 리(약 40km)였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주 대첩을 강감찬이 소가죽으로 막았던 둑을 터뜨려 거란군을 전멸시킨 전투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 기념관의 귀주 대첩 모형에도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들과 칼을 뽑아든 강감찬 장군의 모습이 전시되어 있지만, 귀주에는 강이 없지요.


귀주 대첩은 들판과 계곡 등지에서 싸운 전투였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귀주 대첩 이야기는 실제는 흥화진 동쪽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하는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두 전투를 모두 합쳐서 귀주 대첩이라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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