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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광종] 인재를 뽑기 위해 과거제를 만들었어

by 제이노엘 2016.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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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입니다.



광종 그는 누구인가요?

- 고려 제4대 왕(925~975).

- 재위 기간은 949~975년.

- 태조의 셋째 아들로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 958년에 쌍기의 건의에 따라 과거 제도를 실시함.



그럼 우리 같이 들여다볼까요? ㅋㅋ



왕위 다툼에 시달린 혜종과 정종


왕건이 혼인 정책으로 호족들과 융합하려 한 건 매우 위험한 정책이었습니다.


세력이 큰 외가를 배경으로 태어난 아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왕건이 죽고 난 후에 왕위를 둘러싸고 많은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다툼으로 왕건의 큰 아들인 혜종은 왕이 된 지 얼마되지 않아 죽었고,


둘째 아들이었던 정종은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고까지 했으나 실패하고 죽었습니다.


여러 형제와 외척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왕권이 약해져서 일어난 일들이지.



이때 왕위에 오른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만들었습니다.


광종은 처음 왕이 되고 7년 동안에는 호족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면서 자기 편으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그 후 4년 동안 왕을 위협하는 호족의 세력을 과감하게 누르며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했지요.


그럼, 왕권이 강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왕의 말을 잘 따르는 신하,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군대, 이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한 돈.


광종은 이것들을 갖춰 나갔지요.


먼저 많은 양인, 즉 평민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양인은 왕에게 세금을 내고 군대를 가기 때문이이죠.


반면 노비는 주인을 위해서 일하고, 세금도 내지 않고, 군대도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광종은 956년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양인으로 돌아가게 하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했지요.


이 정책으로 호족들은 많은 노비를 잃어버리고 경제 기반이 약해진 반면, 왕권은 강해졌습니다.





노비라는 말은 남자 종이라는 뜻의 ‘노(奴)’와 여자 종이라는 뜻의 ‘비(婢)’가 합쳐진 말입니다.


노비는 사고팔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남자 노비보다 여자 노비가 비쌌습니다.


왜냐하면 여자 노비는 아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죠.


여자 노비가 낳은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자 노비를 소유한 주인의 노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자 노비보다 더 비싼 것은 타고 다니는 말이었다니, 좀 웃긴 시대였지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과거제


958년, 광종은 중국에서 온 쌍기의 권유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했습니다.


과거제는 중국의 수나라에서 처음 실시된 제도로 시험을 통해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관리를 뽑을 때 다른 사람의 추천을 받거나 출신 집안을 봤는데


이제는 본격적으로 시험을 보는 제도가 생기게 된 것이지요.


과거제가 생기면서 양인 이상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해서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집안이 좋고나쁨에 상관없이 유교의 학식과 능력에 따라 관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양인이 과거 공부에만 매달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전 시대에 비하면 훨씬 많이 발전한 거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과거를 통해서 새로운 세력들이 정치에 진출하였고, 이들은 왕에게 충성을 바치며 정치와 행정 실무를 담당했습니다.


이처럼 과거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실시한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관직이 세습되는 음서제


하지만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야만 관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위 관직에 있거나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의 자제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음서제가 있었지요.


보통 과거는 한 번에 한 명씩 합격할 수 있었는데,


음서는 아들, 사위, 손자, 외손자까지 일가족을 모두 관직에 오르게 할 수 있는 제도였습니다.


9살의 어린 나이에 음서를 통해서 관리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고위 관리에게는 공음전이라는 토지를 주어 대대로 자식에게 남겨줄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 번 관리는 영원한 관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음서제와 공음전은 고려가 귀족 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만약 반대하는 귀족이 있다면?


광종이 이렇게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호족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요?


많은 호족들이 반대했지만, 오히려 광종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호족을 죽였는지 왕위에서 물러날 무렵 광종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을 위해 절에서 불공을 드리며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제 고려는 더 이상 호족들 때문에 왕권이 위협을 받는 나라가 아니라 왕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이 갖춰진 것이지요.


자신감에 찬 광종은 고려를 제국이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황제라고 했습니다

.


그럼 무신은 어떻게 뽑았을까요?


고려 시대의 과거에는 무과가 없었다고 했지요?


공양왕 때 무과를 실시하려고 했으나, 실제로는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각 지방에서 힘이 세다고 소문난 사람들을 무신으로 임명했지만, 높은 관직에 오를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강감찬 장군, 서희 장군, 윤관 장군 등 많은 고려의 장군들은 모두 문신 출신이지요.


싸움은 무신들이 하지만, 언제나 문신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지요. 무신은 승진도 잘 되지 않고, 문신에 비해서 많은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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