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이노엘입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와 발해가 있었는데,
그 이후는 어찌 되었을까요?
짧게나마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 역사속 인물을 하나 하나 차근 차근 살펴보면요,
견훤은 경상북도 상주 지방에 살던 농민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신라의 군인으로 본래 서남 해안, 그러니까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의 바다를 지키다가 세력이 커지면서 호족으로 성장했습니다.
때마침 가혹한 세금에 반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이들과 황해안의 해상 세력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후 점점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 900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지요.
견훤의 부인이 완산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 지역 호족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을 거야.
궁예는 신라의 왕족 출신인데, 경문왕의 후궁이 낳은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궁예는 자신을 버린 신라에 대한 미움과 적개심이 컸겠지요.
처음에 궁예는 양길이라는 유명한 도적의 부하로 들어가서 인정을 받다가 점차 세력을 키워 양길을 제거하고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왕건 부자를 비롯한 경기도, 강원도 지역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서 송악(지금의 개성)을 도읍지로 나라를 세웠지요.
이 나라가 바로 901년에 세워진 후고구려야. 후고구려의 건국으로 통일 신라는 분열되고 본격적인 후삼국 시대가 시작된 거야.
900년에 후백제가,
901년에 후고구려가 세워지며
다시 삼국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로써 힘들게 통일한 통일신라는 끝
왕건은 송악에서 이름난 호족인 왕륭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왕륭의 어머니는 용왕의 딸이라고 하지요.
이 이야기는 왕건 집안이 대대로 바다에서 무역 활동을 하며 돈을 많이 벌어들인 해상 세력 출신이라는 걸 의미합니다.
왕륭은 왕건과 함께 송악을 궁예에게 바치고 그의 부하가 되었고,
왕건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차지하며 궁예의 사랑을 받는 장군이 되었어.
더군다나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수군을 이끌고 멀리 나주를 공격해서 후고구려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후백제 땅 밑에 있는 나주를 찾아볼까요? 왕건은 큰 공을 세우며 36세의 나이에 최고의 벼슬인 시중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왕건은 견훤이나 궁예와 달리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견훤은 신라를 습격하여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던 경애왕을 자살하게 만든 사건이 있어서 신라인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궁예는 자신을 살아 있는 미륵이라고 우기면서 백성들을 괴롭히고 의심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왕건은 궁예나 견훤과는 달리 백성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요.
신라 말의 혼란에서 고통을 겪던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주고, 군대의 규칙을 엄격하게 해서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송악을 근거지로 조상 대대로 살아오면서 확고한 토착 세력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지라,
왕건은 홍유, 신숭겸,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에 송악을 도읍지로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안동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 왕건과 이곳 사람들이 견훤을 낙동강 물 속에 밀어 넣었다고 하여
그때부터 팔짱을 낀 채로 어깨로만 상대 편을 밀어내는 차전놀이가 생겼습니다.
이때 벌어졌던 전투를 고창 전투라고도 불르지요.
경순왕의 아들 마의 태자, 그리고 천 년 신라의 멸망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는 구호를 외치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신라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일로 경순왕도, 신라 백성들도 자존심이 많이 상했지요.
이때 고려의 왕건은 경순왕을 도와줬을 뿐만 아니라 ‘상부’라고 부르며 섬겼기 때문에 고려에 대한 신라인들의 감정이 좋았습니다.
결국 935년에 신라의 경순왕은 스스로 고려에 신라를 넘겨주었지요.
천 년을 이어왔던 신라가 멸망한 것 입니다.
왕건은 자신의 맏딸인 낙랑 공주를 경순왕과 결혼시키고, 벼슬을 주어 경주 지역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한편, 아버지가 싸우지도 않고 신라를 고려에 넘겨준 것에 울분을 참지 못한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군사를 동원하여 전쟁을 할 것인지, 절에 들어가서 스님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결국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마(삼베)로 만든 옷을 입고, 나물만 먹다가 죽었답니다.
삼베로 만든 옷은 사람이 죽었을 때 입는 옷이지요.
이후 사람들은 이 태자를 가리켜 마의 태자라고 불렀습니다.
금강산 비로봉 구역에는 마의 태자릉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하는데 언제 보러가지요? ㅋㅋ
견훤의 아들 신검, 그리고 후백제의 멸망
견훤은 첫 번째 왕비에게서 신검, 용검, 양검의 세 아들을 얻었지요.
그리고 여러 부인에게서 모두 10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견훤은 어린 금강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아들들을 차별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자식들의 불만이 컸지요. 엄청.
특히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고 아버지를 도왔던 큰 아들 신검은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동생들과 외갓집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쫓아내 버렸습니다.
금강은 죽이고, 견훤은 금산사에 가두었지요.
아들 때문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견훤은 몇 달 후 탈출하여 왕건을 찾아 고려 땅이 되어버린 나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936년 후백제의 신검 군대는 고려군을 맞아 싸우다 패배했지요.
자신이 만든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는 견훤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요?
얼마 후 그는 화병으로 몸에 종기가 나고 등창을 앓다가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견훤의 무덤은 지금 충청남도 논산에 남아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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