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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대조영] 발해를 건국한 고구려인

by 제이노엘 2016.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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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나라가 있다면,


첫째로, 고조선일테고,


둘재로, 고구려일테고,


셋째로, 발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니 어쩌면 발해가 고구려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와 발해 둘 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북경 지역을 먹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저 북으로 저 추운 러시아 땅으로만 올라갔던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아마 너무 추워서 중국도 뭐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꺼라 추측합니다.


그시대에 논이나 밭이 풍성하지도 않았을테니까 말이죠 ㅋㅋㅋ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대동강 이북의 땅은 당나라의 지배 아래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는 고구려 부흥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었지요.


당나라는 고구려의 맥을 끊으려고 옛 고구려의 중심 세력을 영주 지방으로 옮겨 살게 했습니다.


발해의 역사는 이렇게 끌려간 고구려인들에 의해 시작됩니다.


고구려의 장군이었던 걸걸중상(대중상)이 요서의 영주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그의 아들 대조영은 당나라의 대군을 무찌르고 옛 고구려 땅 동모산 근처에 발해를 세웠습니다(698)


이로써 우리 민족은 대동강을 경계로 신라와 발해가 남과 북으로 대치하는 남북국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발해의 주민은 소수의 고구려인이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말갈인이 다수의 피지배층을 구성한 나라였습니다.


발해가 있었던 기간은 698년에서 926년까지 229년간이며, 15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해집니다.




발해를 우리 역사로 파악하여 본격적으로 교과서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용 교과서부터라 합니다.


이전에도 발해를 다루기는 했으나 이때부터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를 합쳐 ‘남북국 시대’라는 표현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이지요.


‘남북국 시대’ 이전에는 ‘통일 신라 시대’라는 용어를 썼는데, 그 용어 안에는 발해가 빠져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발해를 우리 역사 속에 넣자는 의미에서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겁니다.


하지만 ‘남북국’이란 말은 우리가 처음 지어낸 말이 아니라, 이미 신라의 최치원이 발해를 북국이라고 쓴 기록이 나옵니다.


또한 조선 후기 실학자인 유득공도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썼으니까 전혀 생소한 용어는 아니지요? ㅋㅋ




우리는 발해를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로 믿어 의심치 않지만,


중국은 발해를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에 세워졌던 나라라는 이유만으로


‘당나라의 지방 정권’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중국은 현재의 영토를 중시하여 자신들의 땅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자신들의 역사라고 우기지요.


그래서 발해도 자신들의 역사 속에 포함시켜 이해하려고 하는게 아닐까요?


첫째로, 발해국에는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있는데 주민들 가운데 고구려인이 적고 말갈인이 오히려 많다.

둘째로, 발해의 첫 왕 대조영은 당나라로부터 발해 군왕이라는 벼슬을 받았으므로,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 세력이다.


로 말이죠 ㅋㅋ



발해가 단일 민족 국가였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텐데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이 다수의 말갈인과 함께 건국한 국가입니다 국가.


백성의 대다수가 말갈족이었는데, 말갈족은 나중에 여진족이라 불리게 되고,


지금은 한족(중국 민족)에 포함되어 만주족으로 불리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중국은 이를 근거로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발해가 무조건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다고 우리 역사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중국이 발해를 자기들의 선조가 세운 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올바른 근거를 대며 발해가 왜 우리 역사인지 조목조목 따져 알려줍시다.



첫째,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고구려계 사람이었지요.


중국의 역사책 《구당서》에 “본래 고구려의 또 다른 종이다.”라고 나와 있고, 《오대회요》에도 ‘고려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 비록 소수였지만 지배층이 고구려인이었습니다.


발해가 일본에 파견한 사신 85명 중 26명이 고구려식 이름이었고, 6명이 말갈계 이름입니다.


또 중국 책 《송막기문》을 보면 발해 유력 귀족의 성씨로 “고, 장, 양, 이 등이 있는데이 가운데 고 씨가 제일 많다.”


라고 했던 걸로 봐서 지배층의 다수가 고구려인이었음을 알 수 있지요. 고 씨면 고구려를 만든 주몽의 후예가 아니겠습니까?



셋째, 발해 국왕 스스로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왕임을 밝히고 있고,


일본 기록을 보면 발해가 초기에 일시적으로 ‘고구려’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발해가 일시적이지만 고구려라는 국호를 썼다면 이는 발해의 고구려 계승 의식이 분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넷째, 발해 문화는 고구려 문화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온돌 장치라든지 기왓장, 돌방 무덤 양식, 석등 등을 보면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지요.



어때! 이 정도면 중국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던 당당하게 “발해는 우리 민족의 국가야.”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우리나라와 중국이 발해사를 놓고 싸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발해의 영토가 우리나라의 북한 지역,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


중국 만주의 중부와 동부 지역에 걸쳐 있으며 각국의 영토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의 정통성을 직접 이은 나라가 없기 때문에 서로 자기네 나라라고 하는 거지요.


이건 뭐 마치 상속인이 없는 재산을 두고 다투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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