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이노엘입니다.
바다의 왕자 박명수가 아닌 원조 바다의 왕자 장보고!
그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같이 해볼까요?
완도에서 평민 출신으로 태어난 장보고는 골품제 사회인 신라에서는 출세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당시 신라 사회는 왕위 다툼으로 국력이 약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힘들었고, 도적과 유랑민이 들끓었지요.
이런 신라의 상황을 벗어나 장보고는 더 넓은 세상을 찾아 당나라로 건너갔습니다. 유학파지요.
이래서 우리도 해외를 보고 세상을 넓게 살아가야 합니다. 유학가세요.
당시 당나라는 각지에서 장군들이 병사를 거느리고 다스리던 혼란한 때였습니다.
장보고는 서주 무령군에 들어가 장교가 되었지만 외국인으로는 승진에 한계가 있었지요.
그래서 장보고는 신라에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죠. 애국심이 불타 오르던 시기였습니다.
고국에 돌아온 장보고는 경주에 머물며 당에서 가져온 사치품을 신하들에게 뇌물로 주며 왕을 만날 기회를 만들었는데,
마침내 기회가 와서 흥덕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흥덕왕은 장보고의 말을 받아들여 특별히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했습니다.
‘대사’는 신라 역사상 장보고에게만 주어진 직위였답니다.
장보고를 해상왕이라 부르던 이유를 한번 추측해 보자면,
먼저 장보고는 당나라 사정에 밝았고, 당나라 사람들과 언어 소통이 잘 되었습니다. 유학파니까요.
또 강력한 무력과 활발한 신라인들의 무역 활동이 합쳐져 청해진은 단기간에 급속도로 성장할 수 밖에 없었지요.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해적들의 활동이 크게 줄어들은건 당연지사.
그 뿐만 아니라 산둥 반도에 법화원이란 큰 절을 세워 중국 내 신라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남해와 황해 바다의 해상권을 장악한 그를 ‘해상왕 장보고’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애석하게도 우리는 왕게임에서나 왕을 해보지 언제 또 왕을 해보겠습니까?
드디어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가 온 장보고는 청해(완도)를 그 장소로 정했습니다.
청해는 삼면이 바다로 수심이 깊어 큰 배를 대기 쉬울 뿐 아니라 태풍을 피할 수도 있는 자연 요새지로,
이곳은 남해안이나 해남, 강진에서 당의 산둥 반도로 가는 바닷길을 감시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장보고는 그 곳 주민들을 동원해 성을 쌓고 군대를 조직하여 무역선을 보호하면서 날로 번창했습니다.
몇 년이 되지 않아 청해진은 당-신라-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무역 센터이자, 해군 기지가 되었고,
군사도 1만 여 명이 넘었고 해외 무역에 종사하여 이름을 날렸지요.
장보고는 청해진 뿐만 아니라 당의 산둥 반도도 근거지로 활용했습니다.
산둥 지역은 그곳의 개가 짖거나 닭이 울면 우리나라에까지 그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우 가깝기 때문에 일찍부터 무역 통로가 되었던 곳입니다.
장보고는 산둥 반도와 완도의 청해진을 근거지로 삼아 동아시아 바다를 장악하고 국제 무역을 주도해 나갔고,
장보고는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와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산둥성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짓기도 했습니다.
장보고는 세력이 커지면서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장군으로 승진했지요.
원래 장군은 각 부대의 최고 지휘관으로, 진골 출신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평민 출신인 장보고가 장군이 된겁니다.
이제 장보고는 단순한 지방 세력이 아니라 중앙 정치에 큰 영향을 행사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지요.
이에 일부 신하들이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후궁으로 추천했지만
대다수 신하들은 장보고가 진골은 물론 6두품도 아니라며 반대했습니다.
결국 이 혼사는 없었던 일이 되었고, 그의 세력을 두려워한 중앙의 진골 귀족들은 장보고를 제거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지요.
직접 공격을 하자니 자신이 없고 내버려두자니 너무 세력이 커져 걱정하다가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암살자로 보냈는데,
장보고는 아무 의심 없이 염장을 귀한 손님으로 우대하여 술자리를 열어 실컷 마시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장보고가 취해 있을 때 갑자기 염장이 칼을 뽑아 장보고의 목을 베어 죽였고, 장보고로서는 너무 어이없는 죽음이었지요.
이렇게 또 훌륭한 인재가 안타깝게 죽어버렸더 옛날 이야기 입니다.
장보고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해 올 것을 두려워했던 신라의 중앙 귀족들은 결국 장보고를 죽이고 청해진까지 해체시켰습니다.
그래서인지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죠.
장보고가 많은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반역자로 암살당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들이 대부분 없어진 것으로 추측합니다.
장보고의 죽음은 한 사람의 불행으로만 끝난 게 아니죠.
9세기 중엽 세계를 무대로 무역을 펼치던 청해진이 사라졌고, 이는 곧 신라 경제의 기둥 하나가 무너진 것이지요.
장보고가 죽은 후 신라는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된답니다.
참고로, 장보고가 청해진을 만들었던 9세기 초반은 서양에서는 바이킹이 한참 활동하던 때였습니다.
바이킹은 노르웨이의 노르만 인을 가리키는데, 779년에 최초로 잉글랜드를 침입하고, 830년 경에는 브리타니아를 공격하죠.
이 후 200여 년간 노르만 인이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가는데,
장보고와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도 해상 세력인 바이킹의 활동이 두드러졌다는 점은 대단히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않습니까?
서양의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기후와 연결시켜 보기도 하는데,
대체로 지구 온난기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해수면이 높아져 해상 세력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문화도 꽃피는 시기라는 거지요.
같은 시기에 동양과 서양에서 해상 세력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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