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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불국사와 석굴암] 불교의 나라, 신라

by 제이노엘 2016.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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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입니다.



경주 수학여행 2탄으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살펴보도록 해볼까요?


불국사(佛國寺)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있는 절로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됨.



석굴암(石窟庵)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 동쪽에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굴 사원으로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됨.





불국사에 가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청운교와 백운교입니다.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아서 다리처럼 안 보이지만, 예전에는 이 다리 아래쪽에 연못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계단 왼쪽을 보면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합니다. 정말 아름다웠겠지요?


이 다리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다리를 지나면 일반인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는 거죠.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서른 세 가지의 단계를 의미하기 위해 계단도 33개로 만들었어.


아래에 있는 계단인 청운교는 푸른 청년의 모습을, 위에 있는 백운교는 흰머리 노인의 모습을 빗대어 만든 거라고 합니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딛고 올라서면 자하문을 만나게 되는데, 자하(紫霞)는 ‘붉은 노을’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부처를 향한 마음이 가득했던 신라 사람들은 이 문을 지나 부처를 만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출입 금지가 되어 이 문을 지날 수는 없답니다.



청운교와 백운교 쪽에서 바라본 불국사



자하문을 열면 대웅전 앞뜰이 보이는데, 이곳에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석가탑과


10원짜리 동전에서 보았던 화려한 다보탑이 있습니다.


탑 사이로 곧장 올라서면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안에는 주인인 부처님이 인자하신 모습으로 앉아 있고,


청운교와 백운교의 왼쪽에는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습니다.


연화교에는 연꽃을 새겨 놓았는데


이는 흙탕물 속에서도 티끌 하나 묻지 않고 피는 연꽃처럼


세상의 찌든 때를 벗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라는 의미라고 전해집니다.



칠보교 위에 올라서면 안양문이 있는데,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극락전 앞뜰에 도달하게 됩니다.


앞뜰 가운데에는 석등이 하나 있고 석등 앞에 돌이 놓여져 있고, 이 돌은 향로를 얹고 향을 피우던 받침대로 추측합니다.


석등을 지나면 극락전인데, 이 건물은 여러 번 새로 고친 건물이지만 안에 앉아 계신 부처는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거라 합니다.


그래서 국보 27호이며, 천 년의 세월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도록 보관도 아주 훌륭히 잘 했지요.



석가탑




안양문과 자하문 사이에는 범영루가 우뚝 솟아있는데, 범영루 아래의 돌기둥은 아주 특이한 모양이입니다.


8개의 각기 다른 돌로 쌓았는데 밑부분은 넓게 하고 중간은 다시 가늘고 좁게 하였다가 윗부분은 다시 밑부분과 같이 넓게 쌓았습니다.


돌의 원래 모양을 그대로 살려 내면서 이처럼 멋지게 쌓아낸 신라 석공들의 돌 다루는 솜씨는 정말 대단하지요.


완성하기까지 30년이 넘게 걸린 불국사는 백제의 솜씨, 고구려의 기상, 신라의 정성이 모여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불국사를 통해 예전의 신라가 아니라 통일 이후 달라진 신라의 문화 수준을 볼 수 있답니다.



1983년 이전에 만들어진 10원짜리 동전과 그 이후에 만들어진 10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다보탑의 그림은 다르죠.


1983년 이전 동전은 다보탑 계단 위에 돌사자가 없고,


그 이후 동전부터는 돌사자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냥 단순한 업데이트?


원래 다보탑 계단 위에 4개의 돌사자가 있었는데 일제 시대에 3개를 잃어버리고, 1개만 외롭게 남아 다보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1983년 이전 동전은 돌사자가 없는 면의 다보탑을 정면에서 그렸다면, 그 이후의 동전은 돌사자가 있는 면에서 그린 거지요




석굴암은 사각형의 앞방과 부처님이 앉아있는 원형의 뒷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각형의 앞방은 부처님께 절을 하고 공양을 드리기 위한 장소로


불법을 지키는 신이 4명씩 서 있고, 바로 옆에는 근육질의 인왕상이 얼굴에 잔뜩 힘을 주고 서 있습니다.


사각형의 앞방을 지나 원형의 뒷방으로 가는 통로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원형의 뒷방으로 들어가 보면, 부처님이 앉아 있는 방 벽면에 여러 불상들이 좌우 대칭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방 가운데 연꽃자리 위에 앉아 계신 석굴암의 본존불을 만나볼 수 있는데, 부처님이


“너 왔구나.”


하며 부드럽게 반겨주시는 것 같습니다.


단단한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 조각하여 모난 데 하나 없는 둥글둥글한 부처님을 만들어낸 신라 석공들의 손놀림이 정말 대단해 보이지요?



부처님이 앉아있는 방향은 정확하게 동남쪽 30도 방향입니다.


그래서 동해에 떠오르는 해가 부처님의 이마를 비추면 석실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을 거고,


천장은 360여 개의 돌판을 둥글게 쌓았습니다.


사각 돌판으로 쌓아 올라가다가 천장의 중앙은 20톤 무게의 연꽃이 조각된 덮개돌로 마무리를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천장의 덮개돌이 세 조각으로 깨져 있지요.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석굴을 만들 당시에 이미 깨져 있었다고 하는데,


무려 천 년을 조각난 채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겁니다.


접착제도 없이 돌판과 돌판을 둥글게 쌓은 기술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대단한 기술이지요.


신라 사람들의 돌 다루는 기술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석굴암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인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완벽한 조화의 세계를 구축하여 무려 1200년을 이어왔습니다.



왜 굴을 만들어 그 안에 부처를 모시게 된 걸까요?


석굴 사원은 인도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중국을 거쳐 우리 땅에 전해졌습니다.


인도나 중국에서는 절을 짓기보다 돌을 파서 그 안에 부처를 모시는 게 쉬웠죠.


왜냐하면 그곳의 돌은 ‘사암’ 이었기 때문입니다.


김대성은 인도나 중국처럼 석굴을 만들고 싶었지만, 우리나라 산은 단단한 화강암이 많기 때문에 굴을 뚫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돌을 쌓아 올려 인공적으로 석굴을 만들게 된 것이지요.


세계적으로 유일한 인공 석굴이 탄생한 거지요.


김대성은 석굴을 만들고 그 안을 부처의 세계로 꾸민 후에 절 이름을 ‘석불사’라고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국사가 크게 훼손되면서 석불사도 큰 피해를 입었고, 불국사의 작은 암자가 되어 ‘석굴암’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 종은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성덕 대왕 신종으로


봉덕사에 있었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고도 불리웁니다.


또 에밀레종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는 슬픈 이야기가 있지요.


이 종을 만들기 위해 스님들은 전국을 누비며 집집마다 쇠를 모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집에서 너무 가난해 쇠가 없다며 아이를 바쳐 끓는 쇳물 속에 아이를 함께 넣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전설일 뿐이겠지요?


불국사나 석굴암처럼 모두 수십 년이 걸린 큰 사업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이런 어려움 끝에 만들어진 종소리를 들으며 백성들은 엄마, 아빠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떠올린게 아닐까요?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든 사람은 김대성입니다.


김대성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한창 발전하던 시기에 모량리에 살던 사람이으로


대성이라는 이름은 워낙 머리가 크고 이마가 펀펀하여 모양이 마치 성 같아서 ‘큰 성’이라는 의미로 불렸던 것이라 합니다.


김대성의 집안은 무척 가난해서 매일같이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아야 할 정도였고


김대성이 열아홉 살 되던 해 어느 날, 김대성은 가진 밭을 부처님께 기부하자고 어머니를 졸랐습니다.



그런데 그 밭은 머슴살이를 하며 받은 것으로 고작 3묘(90평) 밖에 안 되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밭을 시주하자고 조르는 김대성에게 어머니는 철이 없다고 꿀밤을 때리기는 커녕


아들의 말이 옳다 여기고 전 재산인 3묘의 밭을 스님에게 시주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 웬열?


그 밭을 시주하고 난 지 몇 달 안 돼서 대성이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대성이 죽던 그 시각에 신라에서 아주 잘 나가던 김문량의 집을 향해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를 너희 집에 맡기노라.”


그 후 김문량의 부인은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귀한 아들을 낳았는데,


태어난 그 아들의 손에 ‘대성’이라는 두 글자가 또렷이 새겨진 쇠붙이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의 김대성이 부처님께 전 재산을 시주한 덕으로 부잣집에 다시 태어난 거죠.



김문량은 대성의 전생의 어머니를 자기 집으로 모셔와 봉양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난 김대성의 불교를 향한 마음은 지극했지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만이 부모님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다시 태어난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었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짓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 작업은 2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안타깝게도 작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김대성이 못다 이룬 일은 국가가 나서서 완성했구요.




지금 석굴암에 가보면 석굴 앞에 나무로 만든 집이 들어서 있고,


석굴 내부를 보존하기 위해 유리창으로 석굴을 막아두었습니다.


원래는 나무집도 없었고, 직접 석굴 안에 들어가야 부처님을 만나 뵐 수 있었다는데,


왜 나무집이 만들어졌냐면,


일제 시대 일본은 천장의 앞쪽 3분의 1 정도가 손상되어 구멍이 난 것을 보수하려고


석굴 전체를 2m 두께의 시멘트로 발라 기차 터널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시멘트를 발라버리자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지요.


석굴암 내부에 공기 순환이 안 되어 돌 표면에 이슬이 맺히고, 불상들에 푸른 이끼가 끼었으며, 돌들이 쉽게 깨지고 잘게 부서졌어.


이런 문제는 계속 해결되지 않고 있다가 1960년대에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나무집을 지었습니다.


나무집을 지었지만, 내부의 습기는 제거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심해졌구요.


그래서 지금은 강력한 에어컨을 가동하여 석굴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고 있다고 하는데


석굴암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겠지요?


그런데 신라인은 천 년이 지나도록 습기가 생기지 않는 석굴암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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