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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문무왕] 드디어 이루어 낸 삼국 통일

by 제이노엘 2016.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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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입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이 등장했습니다.


660년, 당의 13만 대군이 백제를 향해 출발하고, 신라의 김유신이 5만의 병력으로 백제의 동쪽 국경을 넘고 있었습니다. 합이 약 19만. 엄청나죠?


이때 백제의 의자왕은 쉴 새 없는 전쟁을 계속함으로써 백성들을 지치게 했고, 귀족들은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에 반발했습니다.


의자왕과 신하들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허둥대는 가운데 백제군은 황산벌을 빼앗겼고


수도 사비성도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백제가 무너지자 당은 곧바로 백제 땅에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함으로써 영토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고,


이에 대항한 백제의 부흥 운동은 흑치상지, 복신, 도침, 왕자 풍을 중심으로 줄기차게 계속되었습니다.




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의 뜻을 이어받아 통일 전쟁을 해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었습니다.


이런 문무왕의 옆에는 무열왕 때부터 지켜주었던 충신 김유신이 있어 신라의 통일 전쟁은 계속 이어졌지요.



그리고, 661년 신라와 당은 남북에서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기병을 앞세운 당의 대군이 밀려오자 신라군은 이를 지원하기 위해 나섰지요.


그러나 백제 부흥군은 당과 신라의 연결을 끊고 백제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을 위협했습니다.


신라군은 백제 부흥군과의 싸움에 나서고, 당군은 혼자서 고구려와 싸우게 되었지요.


해를 넘기고 반 년간 평양성을 포위하였던 당군은 고구려의 굳센 방어에 밀려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는데,


거듭되는 전쟁으로 고구려의 국력은 점점 약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한 시점에서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에서는 권력 다툼이 일어났지요.


668년 9월 21일, 고구려는 마침내 쓰러졌고, 삼국 간의 치열한 다툼도 여기서 막을 내렸습니다. ㅜㅜ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였지만 바로 신라에게 온전한 승리의 기쁨이 찾아온 것은 아니지요.


백제 땅, 고구려 땅, 그리고 신라 땅에서도 오직 당나라 군사만이 승리자 행세를 하고 있었는데,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는 그 땅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려 들었습니다.


신라에도 계림 도독부를 설치하여 문무왕을 계림 도독이라 불렀는데, 이건 원래 약속과 다른게 아니겠습니까?


원래 당나라와 신라가 했던 약속은 대동강 이북의 땅은 당나라, 이남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당나라가 만주 지역은 물론, 한반도 전부를 당나라의 영토로 삼겠다고 하는 거였습니다. 신라에게 커다란 위기가 다가온 거지요.



또한, 고구려 각지에서 부흥 운동이 빗발치자, 신라는 이를 지원하면서 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전면적으로 공격했지만, 신라는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싸워,


마침내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통일을 완성했어(676년).


이로써 신라는 한반도 중남부를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삼국 초기에는 가장 후진국이었고, 통일 전쟁의 막바지에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신라가 백제의 전역과 고구려 땅의 일부를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삼각형의 세 변 -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간의 전쟁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된 걸까요? 왜 짧은 기간에 승부를 내지 못했을까요? 그 해답을 삼각형에서 찾아볼까요?


삼각형의 한 변은 다른 두변의 합보다 클 수 없습니다. 알고 계셨죠? ㅋㅋ


삼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어느 한 나라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다른 두 나라가 연합하면 이길 수가 없었던 겁니다.


고구려가 강했을 때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는 식이었는데,


즉, 한 나라와 다른 나라가 싸울 때 나머지 한 나라는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할까를 생각해야지요.


자신도 살아야 하니깐 ㅋㅋ


이러한 삼국 간의 뚜렷하지 않은 세력 균형으로 인해 삼국이 연합하고 분리하는 상황이 되풀이되었고 전쟁이 오래 계속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3세기에 걸친 삼국 간의 긴 전쟁에서 신라가 최후의 승자가 됐습니다. 신라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첫 번째 이유.


신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역사에서는 시기가 중요하지요. 영웅도 시대를 잘 만나야 한다고 하잖습니까? 제갈량이 유비를 만났을 때, 유비는 수어지교라는 표현을 했지만,


제갈량의 친구인 사마휘는 공명이 어진 주인은 얻었으나 때를 얻지 못했다고 했듯, 시대가 중요합니다. 시대가.


우리가 아주 좋은 시대에 살듯 말이죠 ㅋㅋ


안 맞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신라의 발전이 다른 나라에 비해 늦었던 점이 오히려 신라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답니다.


왜냐하면 고구려와 백제는 고대 국가 단계에 일찍 들어갔기 때문에 국가 체제 자체가 이미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신라는 고대 국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국민들이 국가 발전에 대해서 보다 헌신적이었고, 국가 자체가 성장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


중국 세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신라가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중국의 통일이었지요.


수·당이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고구려와 백제를 적극 공격하려고 할 때,


신라는 그 속에 끼어들어가 중국 세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해서 실리를 얻었던 겁니다. 아주 얍삽한 플레이가 성공한 것이죠.



세 번째 이유,


세속 5계로 국민을 통합했습니다. 세속 5계는 화랑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이를 통해 신라인들의 단결이 이루어져 국토를 지키고 외적을 물리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지요.




기나긴 전쟁이 끝나자 문무왕은 이제 수도를 새롭고 근사하게 꾸미고 싶어 먼저 성곽을 쌓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상은 문무왕에게


“초가에 있을지라도 정도를 행하면 오래도록 복을 누릴 것이나,

만약 그렇지 못하면 사람들이 아무리 애를 써 높은 성을 쌓을지라도 유익한 바가 없을 것입니다.”


라는 충고의 글을 보냈었습니다.


전쟁으로 힘들었던 백성들을 또다시 부역에 동원한다는 것은 사실 무리였기 때문에 왕은 공사를 중지시켰지요.


그 뒤로 문무왕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구요.




문무왕의 큰 아들이 왕위에 올라 신문왕이 되었습니다.


신문왕은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진골 귀족 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여 통일 후 국가의 기틀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지방 행정 제도인 9주 5소경, 중앙 군대인 9서당, 지방 군대인 10정을 마련했으며, 그 외 여러 가지 제도 정비를 통해 통일 신라의 발판을 확고히 했지요.


《삼국유사》에는 이러한 통일 신라 시대의 안정된 모습을 반영하는 ‘만파식적’이라는 신비스러운 피리에 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을 이룩하였고, 이로써 하나의 새로운 민족 문화를 이루는 바탕이 마련되었습니다.


하지만 통일 과정에서 중국 세력인 당나라의 힘을 빌렸다는 점과 이남 지역에 한정됨으로써 고구려의 영토를 잃게 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지요.


이렇게 신라의 삼국 통일을 보는 시각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함께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으로,


신라는 기원전 57년 경북 경주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고대 국가로 늦게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출발한 고구려, 백제와 힘을 겨루다가 두 나라로부터 압력을 받자, 당나라를 끌어들였습니다.


그리하여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쓰러뜨린 후 삼국 통일이 찾아오나 했지만, 당나라가 여기서 그냥 물러갈 나라가 아니죠!


당나라는 당연히 한반도 전체를 다 가지려고 했지요.


그래서 당나라와 또다시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나라의 의도는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의도를 미리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도 신라의 잘못인게, 무수한 싸움 끝에 이른바 ‘삼국 통일’을 이룩했지요.


그러고는 나라 이름을 통일 신라로 바꾸면서 삼국 시대의 영광을 독차지했습니다.


통일이라고는 하지만 고구려가 차지했던 만주 벌판과 한반도 북부의 땅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과연 삼국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그 곳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라는 나라가 다시 섰는데 말이죠.


그래서 신라의 삼국 통일은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으로,


신라는 처음부터 당나라를 끌어들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김춘추가 고구려를 찾아갔었잖이죠? 결국 그 협상은 한강 유역을 내놓으라는 고구려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깨지고 말았지만요.


그 후 고구려와 백제가 여·제 동맹을 맺어 신라의 목을 조여 왔기 때문에,


신라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당나라의 도움을 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단 말이지요.


죽느냐 사느냐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신라로서는 정당 방위를 한 것 뿐이고, 신라가 아니었더라면 삼국은 아주 남남으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어렵사리 하나로 합쳤기에 오늘날 우리가 있는 것 일수도 있지요? ㅋㅋ



그리고 당나라의 침략 의도를 파악한 후 당나라에 맞서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이 힘을 합쳐


다른 민족인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는 어려움을 함께 함으로써 민족 의식이 생기고, 진실한 의미의 통일을 이뤘다고 볼 수 있는게 아닐까요?


아울러 세 나라의 힘을 모아 통일 신라로 이름을 바꾼 이후 사회, 경제, 문화 모든 것이 좋아졌잖습니까?


서로 싸울 힘을 모아 자기 발전에 쏟았기 때문이지요.


세계적인 문화 유산인 불국사, 석굴암, 가장 오래된 인쇄물인 다라니경을 비롯해


과학 기술과 예술혼이 한데 어우러진 찬란한 민족 문화는 이때 거의 만들어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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