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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원효] 불교계의 새 바람

by 제이노엘 2016.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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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입니다.


원효대사 해골물~


이런 대사를 기억하십니까? ㅋㅋㅋ


원효대사에 대해 알아봅시다.


개콘 김원효의 대사가 아닌 신라 시대 불교를 위해 힘쓴 중. 스님 그분입니다. ㅋㅋㅋ



때는 바야흐로 661년,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마저 점령하기 위해 한창 통일 전쟁을 치르고 있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배움에 목말라 있던 신라의 승려 원효와 의상은 부푼 꿈을 안고


선진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죠.


당시 당나라에는 현장 법사가 불교의 전성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던 무렵입니다.


당나라 불교계의 새로운 바람은 신라에도 전해져서 신라의 많은 승려들은 당나라 유학을 원했고,


원효와 의상 또한 현장 법사 밑에서 공부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거죠.


이들은 오직 부처를 향한 마음으로 경주를 출발했었습니다.


마치 영어를 배우려 미국이나 영국으로 간다는 것과 비슷한 이치겠지요.



두 사람은 몇날 며칠을 걸어 충청남도 직산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어두워져 동굴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이때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죠.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젯밤이나 오늘이나 똑같은데, 어이하여 어제는 달디단 물이었던 것이 오늘은 구역질을 나게 하는가?

그렇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달라진 것은 내 마음일 뿐이다. 진리는 결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원효는 그토록 원했던 깨달음을 해골물에서 얻었습니다.


원효는 경주로 돌아와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책 쓰기에 몰두했고,


 그는 일생 동안 150여 권의 책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중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유명하답니다.





원효의 삶은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원효의 연구와 저술 활동을 지원해 준 사람은 요석 공주로 알려져 있는데,


요석 공주는 태종 무열왕의 둘째 딸로 과부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터서 요석 공주는 원효의 아이를 가지고 말았죠.


그 아이가 커서 신라의 대학자가 된 ‘설총’인데,


설총은 학문이 뛰어나 많은 유교 서적을 번역하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또 이두라는 글자를 정리해 통일 신라의 문화를 다듬었지요.



설총을 낳은 후, 원효는 스스로 계율을 어겼다고 하여 승려복을 벗고 자신을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본떠서 바가지를 만들어 무애가를 부르며 신라 땅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불교를 전하러 다녔죠.


원효는 가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거나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고,


혹은 쇠칼과 쇠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돌에 글을 새기기도 하고,


가야금과 악기를 들고 사당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는 등 세상에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지요.


이러한 삶을 살면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추측 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백성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 백성들과 함께 하려고 했었고,


그는 ‘나무아미타불(부처님께로 돌아간다)’만 외우면 누구나 극락에서 새로 태어날 수 있다고 설교하며


불교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확산시켜 나갔어.


그래서 오두막집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 같은 염불 한마디는 할 줄 알게 되었어. 이 모두 원효의 노력 때문 아니었을까요?




의상은 신라의 진골 출신으로 앞길이 창창하게 보장된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20세 전후의 나이에 승려가 되었습니다.


의상은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중국 화엄종의 대가인 지엄의 밑에서 10년간 화엄학을 공부했고


671년에 신라로 돌아와 신라 땅에 화엄종을 뿌리내렸습니다. 


원효가 대중에게 다가가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불교를 전했다면,


의상은 자신의 제자와 교단 조직을 가지고 불교를 전했지요.


또한 원효가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서 많은 저술을 남긴 대저술가였다면,


의상은 오직 화엄학만을 공부했고 이의 포교에 주력하여 《화엄일승법계도》 외에는 이렇다 할 저서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60권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의 《화엄경》을 210자의 짧은 시로 정리한 《화엄일승법계도》를 보면


의상이 화엄학을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으며, 그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의상과 원효는 여덟 살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고,


나이가 위인 원효는 원래 설씨로 6두품 출신이었고, 의상은 진골 출신이었습니다.


성격도 달라서 원효는 자유분방하고 천재적 기질이 있었지만,


의상은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고 계율을 지키는 데 철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존경하는 단계를 넘어 거의 형제처럼 지냈고,


두 사람 모두 상대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죠.


이러한 인물들이 신라 불교를 이끌었기에 신라 불교가 세계적인 불교로 크게 발전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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