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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6두품과 호족] 신라 말 새 시대를 열어 간 사람들

by 제이노엘 2016.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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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입니다.



신라시대를 대충 정리해서 계급 중에 6두품과 호족이 있었습니다.



6두품(六頭品) : 신라의 골품 제도에서 성골, 진골 다음의 신분.

호족(豪族) : 통일 신라 말기에 등장한 지방 세력가.


6두품과 호족의에 대해 같이 알아봐요 ㅎㅎ



중앙에서 진골 귀족들이 왕위 다툼으로 다투는 동안,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 온 호족들이 진골 귀족 중심의 사회를 무너뜨리고자 나섰습니다.


이들 호족 중에는 왕건처럼 지방을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


궁예처럼 신라 왕족 출신으로 지방으로 내려온 세력,


장보고와 같은 해상 세력, 견훤과 같은 군사 세력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성주나 장군, 심지어는 왕을 칭하기까지 했고,


이들은 지방을 직접 다스리면서 관리를 두어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농민 세력을 모으는 한편,


선종 승려나 6두품 지식인을 맞아들여 신라 정부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를 준비해 나갔습니다.



달은 진리, 즉 본래의 모습을 말하고 손가락은 그 진리를 담은 글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본래 보려고 하던 것은 달이기 때문에 이미 달을 본 사람에게는 손가락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는데, 이게 바로 선종이라 합니다.


문자나 경전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불교의 새로운 종파이지요.


신라 정부의 전통적인 권위에서 벗어나 어려운 교리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선종은 호족에게 매력적이었는데,


왜냐하면 무사 출신이 많은 호족은 문자에 약할 수밖에 없어 그랬답니다.


신라 말 혼란기에 선종은 지방에서 새롭게 성장하고 있던 호족 세력과 6두품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크게 발전했습니다.



골품제 사회에서는 진골 귀족이 아니면 아무리 뛰어나도 벼슬길에서 출세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6두품 세력은 진골 위주의 사회 체제에 특히 반발을 보인 계층이으로,


그들은 중앙 귀족이면서도 관직 승진에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골품제의 모순을 앞장서서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감각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준비했지요.




국학에서 지식을 쌓고도 출세를 할 수 없다 보니 실력 있는 6두품들은 당나라로 유학을 많이 떠났습니다.


6두품 청년 설계두는 친구 네 명과 모여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말했지요.


“신라에서는 사람을 쓰는 데 골품을 따져서

만약 그 골품에 속한 자가 아니면 아무리 큰 재주와 훌륭한 공로가 있더라도 높이 승진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나는 차라리 중국으로 유학 가서

뛰어난 재주를 발휘하고 큰 공을 세워서 칼을 차고 천자 곁에 드나들면 만족할 거야.”


설계두는 훗날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는 데 공을 세우고 전사하여 당나라의 공신이 되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라도, 그리고 죽어서라도 이름을 날릴 각오를 했던 이런 청년을 신라는 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최치원이 12세의 나이에 당나라로 건너갈 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0년 안에 과거에 못 들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 역시 아들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힘써 공부하거라.”


과연 그는 6년 만인 18세의 나이로 당나라에서 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에 단번에 급제했습니다.


성적도 우수하여 바로 관직에 등용됐지요.


당시 중국에서는 황소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는 최치원이 쓴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합니다.



“사람들만 너희를 죽이고자 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너희를 죽이고자 한다.”


이때 쓴 글로 그는 당나라에서 최고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28세에 그는 당나라에서 얻은 명성을 안고 신라로 금의환향했지요.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온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 했지만


진골 귀족 중심의 중앙 정치에 그가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오히려 그에게 돌아온 것은 6두품의 한계인 아찬 벼슬과 귀족들의 시기와 질투였습니다.


최치원은 고국에 돌아와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고. 때를 잘못 만난 거지요.


그래서 자신의 평탄하지 못한 인생과 불우한 신세를 불쌍히 여기고는 다시 벼슬살이할 생각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한창 일할 나이인 마흔에 산속에 파묻혀 글쓰기를 하며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비운의 학자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최치원 외에 최언위, 최승우 세 사람을 가리켜 ‘신라 3최’라고 합니다.


세 사람 모두 같은 시기에 살았고, 신라가 후삼국으로 갈라졌을 때,


최승우는 후백제로 가서 견훤의 책사가 되었고,

최언위는 고려로 가서 왕건의 신하가 되었으며,

최치원은 신라를 구해보려다 실패해 속세를 떠났습니다.


비록 ‘신라 3최’는 신분은 같았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갔지요. 만약 신라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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