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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해동성국] 바다 동쪽의 번성한 나라, 발해

by 제이노엘 2016.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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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입니다.


해동성국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바다 동쪽의 전성기를 맞이한 나라라는 뜻으로


중국에서 볼 때 바다 동쪽에 있으므로 해동이라고 불렸는데,


9세기 무렵 전성기를 맞이한 발해의 국력을 높이 평가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멋진 이름이 아닙니까?


캐릭터 이름으로 해도 멋지리라 생각이 듭니다.



대조영이 건국의 기틀을 다져 나라를 세웠다면, 그 아들인 무왕은 이를 바탕으로 주변 세력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는 당나라를 직접 공격하기까지 했고, 발해군은 거란과 손잡고 육로로 공격했고,


장문휴가 이끈 수군은 당나라의 덩저우를 공격하여 순식간에 점령하여 당나라를 긴장하게 했습니다.



무왕의 아들인 문왕 때는 이전에 정복한 것을 바탕으로 문화 정책을 펴고 국가 운영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786년, 오랜 고민 끝에 문왕은 도읍을 상경으로 옮겼습니다.


이곳은 만주 여러 세력들의 주된 이동로이자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농사짓기에 유리했기 때문이죠.


상경에 자리잡은 뒤 농업이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늘었습니다.


또 상경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 각지를 연결하며 대외 무역에 힘을 쏟음으로써 거친 자연 조건이 주는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어.



날로 발전해가던 발해는 9세기 선왕 때 최대 영토와 국력을 자랑하며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당시 중국인들은 넓은 영토, 활발한 대외 무역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한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합니다.


영토는 15개의 부로 나누고 부 밑에는 여러 개의 현을 두었고,


부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5개의 부에는 경을 두었는데, 5경은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발해는 중앙에 3성 6부를 두고,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처음에 발해와 신라의 사이는 당연스럽게 좋지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발해가 세워진 까닭은 신라 덕분이긴 한데, 고구려가 멸망했으니 어쩔 수가 없었지요.


같은 민족이 세운 나라이지만, 발해와 신라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200년 이상을 대립했습니다.


8세기 전반에는 당의 이간질로 인해 서로 전쟁도 했습니다.


당나라는 발해와 신라의 관계를 적절히 이용하여 자기 나라의 이익을 취하는 이이제이 정책으로 양국의 발전을 막았습니다.


이이제이란 주변국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적절히 부추겨서 자기 나라에 이익이 되게 하는 정책입니다.


손안대고 코푸는 그런 멋진 모습이지요.


다 머리가 좋아야 되요 머리가.



또한 발해와 신라는 당나라가 외국인을 위해서 만든 과거인 빈공과에서


서로 자국인을 1등으로 삼아 달라거나 사신이 앉는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이는 등 치열한 외교전을 펼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양국이 전혀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발해에서 신라로 가는 무역로가 있었고, 양국 간의 사절이 때에 따라서 오고가기도 했으니 말이죠.


발해와 신라는 당나라의 이간질로 자주 부딪히고, 한때는 신라가 발해를 공격하려 한 적도 있지만,


서로 맞서기도 하고 돕기도 하면서 경쟁해 나갔습니다.



발해는 당나라 뿐 아니라, 거란·일본과의 무역에도 큰 힘을 기울였습니다.


발해의 무역선이 수시로 당나라를 드나들었으며, 당나라에는 많은 발해 상인들이 머물렀습니다.


이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당나라의 문화도 발해에 많이 소개되었지요.


일본과의 무역도 활발했지요. 초기에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교류가 계속되면서 경제적 목적이 앞서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했던 해동성국 발해는 9세기 후반에 국력이 기울어지더니,


당나라가 멸망한 후 급속히 세력을 확대시켜 나가던 거란에 의해 멸망했습니다(926).


그렇지만 발해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발해가 어떻게 멸망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는게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다만 최근에는 백두산의 화산이 폭발했기 때문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데, ㅋㅋ


이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주장이고, 거란인들이 기록한 간단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시조가 발해의 내부에서 서로 뜻이 맞지 않는 틈을 타 싸우지도 않고 이겼다.”


이 기록을 보면 지배층 고구려인과 피지배층 말갈인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이 다수의 말갈인을 다스리는 체제였기에,


이 점이 바로 거란에 의해 쉽게 멸망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즉 발해 내에 있던 거란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발해는 내분으로 인해 거의 대항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허망하게 무너진게 아닙니까? 이로써 만주 땅은 발해의 멸망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지요.


그럼 살아남은 발해인은 어디로 갔을까요? 세자 대광현은 고려로 갔습니다.


왕건은 대광현을 후하게 대접해 주었으며, 발해 유민들 중에는 고려로 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814년에 사신으로 간 발해인 왕효렴이 일본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흐뭇한 마음으로 지은 한문 시 입니다.


일본에 간 발해 사신들이 남긴 한문 시를 보면 발해인들의 수준 높은 한문 실력을 짐작할 수 있지요.


발해 사신이 일본에 도착하면, 일본은 신하들 중에서 특별히 한문을 잘하고, 시를 잘 짓는 사람을 뽑아 대접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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