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이노엘입니다.
왕건(王 임금 왕, 建 세울 건)
- 고려의 제1대 왕(877~943)인 태조(太祖)의 본명.
- 재위 기간은 918∼943년.
- 고려를 세운 후,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불교를 호국 신앙으로 삼았으며 신라와 후백제를 합병하여 후삼국을 통일함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
왕건은 새 나라의 이름을 옛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고려’라고 지었고, 영토도 옛 고구려의 땅을 모두 회복하고 싶어했습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을 서경이라 부르며 수도인 개경 다음 가는 도시로 중시하며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지요.
그리고 일 년에 100일 이상을 서경에 머물면서 북방 지역을 순시하고 기회를 노리며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왕건은 〈훈요 10조〉라는 글을 남기면서 “서경을 중시하라.” 고 부탁했지요.
고구려 영토를 되찾을 때까지 북진 정책
고려가 건국되던 918년에는 북쪽에 발해가 있었고. 926년 발해가 거란족에게 멸망하고,
936년 후삼국이 통일될 무렵 고려는 거란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왕건은 이런 거란족이 발해를 멸망시켰고, 고구려가 위치했던 넓은 만주 벌판을 차지했기 때문에 거란족을 싫어했던건 당연한것이었지요.
거란족은 고려와 교류하기 위해 사신 30명과 낙타 50마리를 고려에 보내왔지만
오히려 왕건은 거란 사신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만부교라는 다리 밑에 묶어 놓고 굶겨 죽였습니다.
왕건은 북진 정책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고,
이러한 생각 때문에 거란족은 물론 이후 들어서는 여진족, 몽골족 등 여러 유목 민족과 전쟁하는 원인이 되었지요.
하지만 태조의 이런 북진 정책은 이후 고려 영토가 압록강 유역까지 확장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왕건은 29명의 부인에게서 모두 25남 9녀를 얻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아들 ‘무’를 낳은 둘째 부인 장화 왕후 오씨는 세력이 약한 나주 출신 호족의 딸이었지요.
외척들의 간섭으로 어찌하다 보니 모두 11명의 아들이 태자가 되었고,
숱한 어려움 끝에 박술희를 후견인으로 내세운 첫째 아들이 고려 2대 혜종이 되었지요.
하지만, 혜종은 끊임없는 왕위 다툼 속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이마에 주름살이 많아 주름살 대왕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하지요?
결국 왕이 된지 2년 만에 죽고 말았어.
호족 내 편으로 만들기 - 〈작전 1:혼인을 하여 내 가족으로 만든다〉
왕건은 꼭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주요 호족과는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왕건에게는 정식 왕후 6명과 23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왕건 생존시에 정식왕후로 인정받은 사람은 신혜 왕후 유씨 뿐이었고,
나머지 왕후들은 죽고 난 후에 자식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후로 추대받았습니다.
이 중 왕이 되기 전에 얻은 부인은 신혜 왕후 유씨와 장화 왕후 오씨 2명입니다.
나머지 27명의 부인은 호족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즉 결혼을 통해 처가의 세력을 이용하려는 정략 결혼이었지요.
왕과 호족 간의 정치적 타협이라고나 할까요? 세력이 큰 집안에서는 언니와 동생이 한꺼번에 시집을 온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부인의 출신지는 황해도와 경기도가 12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지역에 고루 분포했다고 합니다.
아마 통일 과정에서 황해도와 경기도 지역의 호족 세력이 가장 강했기 때문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덕분에 왕건이 살아 있는 동안 호족은 다툼 없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습니다.
호족 내 편으로 만들기 - 〈작전 2:벼슬과 땅, 성씨를 준다〉
통일 신라 말에 나라 안에는 아주 많은 호족들이 있었습니다.
호족들은 독자적으로 자기 지역을 다스리고 사병을 거느렸기 때문에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지요.
왕건, 궁예, 견훤 모두 호족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로 통합된 나라를 유지하려면 호족들의 협조를 얻어내는 일이 아주 중요했지요.
왕건은 세력이 큰 호족부터 작은 호족까지 그 세력의 크기에 따라 알맞은 등급의 관직을 주었습니다.
죽은 공신에게 사당을 지어 주기도 하고, 토지를 주거나 성씨를 하사했습니다.
왕건의 원래 이름은 성씨 없이 그냥 왕건이야. 아버지는 왕륭, 할아버지는 작제건, 그러니까 처음부터 왕씨였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성씨를 ‘왕’, 이름을 ‘건’이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성씨를 정해 주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왕건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능산이라는 장군도 신숭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지요.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에는 많은 성씨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왕건의 혼인 정책으로 당시에는 왕권이 안정되었지만,
만약 그 많은 아들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호족의 딸들과 결혼한다면 문제가 커지겠지요?
그래서 왕건은 자식들끼리 결혼을 시켰는데, 대표적으로 넷째 아들 왕소와 셋째 딸 황보씨의 결혼이었어요.
어떻게 왕건의 딸인데, 성이 황보일까요?
고려 시대에는 어머니의 성이나 할머니의 성도 따를 수 있었습니다.
호족들 때문에 왕실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어머니가 다르면 아버지가 같은 자식끼리도 결혼을 시켰다고 전해집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옛 고구려와 백제가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다고 해서 완전히 한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한 나라가 되려면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이 필요하고, 차별 없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지역의 특성을 인정해 주고, 지방의 주요 세력들을 관직에 골고루 배치시켜야 하지요.
왕건은 후고구려, 후백제, 통일 신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지배 세력으로 참여시켰습니다.
더군다나 발해 유민까지도 적극적으로 포섭했지요.
발해 멸망 후 발해 세자 대광현이 발해 유민을 이끌고 망명했을 때,
왕씨 성을 내리고 고려의 지배 세력으로 참여시킨 것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지요.
신라 말에는 땅의 생김새에 따라서 인간의 길흉화복, 즉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결정된다는 풍수지리설이 유행했습니다.
이 사상을 중국에서 들여온 사람이 바로 도선인데,
왕건의 아버지에게 장차 왕이 될 아들이 태어날 거라고 예언한 일화로 유명하지요.
그리고 신라의 수도인 금성(지금의 경주)은 기운이 줄어들고,
왕건이 태어난 송악은 기운이 푸른 소나무와 같다고 했어.
이렇게 태어난 왕건은 어려서부터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을 믿으며 자라났지요.
그리고 왕이 된 후에는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믿었기 때문에 불교를 중심으로 국가를 통합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팔관회, 연등회 등의 불교 행사를 장려하고, 나라 안에 개태사를 비롯하여 많은 절과 탑을 세웠습니다.
풍수지리설에 맞게 절을 세우고, 함부로 옮기거나 새로 짓지 못하게 했지요.
이후 불교는 고려의 국교가 되어서 국가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종교로 자리 잡았습니다.
왕건은 불교를 매우 중시했지만, 도교, 풍수지리설, 유교, 민간 신앙 등 다양한 사상에 대해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외국의 문화를 무조건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요.
우리나라와 중국은 지리가 다르고 인성이 다르므로, 중국의 문화를 무조건 따르지 말고 우리의 풍속에 맞게 따르라고 했지요.
특히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므로 그들의 풍속은 따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ㅋㅋ
개방적이고 주체적으로 외국 문화를 받아들이려 했던 거야.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 끝으로
왕건의 유언장 - 〈훈요 10조>
1. 왕위는 맏아들이 잇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맏아들이 어질지 못하면 그 다음 아들에게 전해 주어라.
2. 서경을 중시하라. (일 년에 100일은 서경에서 생활하기)
3. 풍수 사상에 따라 사찰을 지어라.
4.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실하게 열어라.
5. 불교를 발전시켜라. (고려는 불교의 나라)
6. 중국 문화를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으며, 거란과 친하게 지내지 말아라.
7. 왕은 바른 말을 하고, 남을 욕하는 자를 멀리해라.
8. 관리의 월급을 함부로 깎지 말고, 농민의 세금을 가볍게 하라.
9. 왕은 항상 옛 일을 반성하고 오늘에 참고하라.
10. 차령 산맥 이남과 공주강 밖의 사람은 쓰지 말아라.
첫 번째 조항을 읽어보면, 왕건이 왕위 계승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혼인 정책은 왕건이 살아 있던 시절에는 호족을 융합시킬 수 있었지만,
왕건이 죽은 후에는 왕위를 둘러싼 많은 다툼의 원인이 됐습니다.
이후 고려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뤄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조항에는 서경을 중심으로 북진 정책을 계속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지요.
세 번째부터 다섯 번째 조항까지는 불교를 중심으로 나라를 발전시키려는 의도가 보이지요?
여섯 번째 조항에는 중국과 주변 국가에 대한 주체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부터 아홉 번째 조항까지는 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에 대한 내용이입니다.
이런 왕들만 있다면 누구나 행복한 나라가 될 겁니다. 그렇지요?
마지막 조항은 어쩌면 왕건이 쓴 내용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전해집니다.
왕건은 민족을 융합하려고 했는데, 차별 대우한다는 건 뭔가 이상하지요?
어쨌던 왕건이 남긴 〈훈요 10조〉에는 “차령 산맥 이남과 공주강 밖의 사람은 쓰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왕건이 이 지역 사람들을 미워했던 이유는 끝까지 고려의 통일에 협조하지 않았던 후백제 사람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은 특수 행정 구역으로 정해져서 차별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에 대한 지역 감정을 조장하기 위해 나중에 조작된 것이라는 설도 있구요.
왕건은 무엇보다도 민족의 융합을 중요하게 여겼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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