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공민왕 恭愍王]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파!

by 제이노엘 2017. 11. 4.
728x90
반응형

안녕하세요, 제이노엘 입니다.



고려도 말기에 접어 들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KOREA 라는 이름이 고려 인건 아시죠?


끝으로 다가오니 왠지 모를 씁쓸함이 전해지네요.



공민왕은 고려 제31대 왕(1330~ 1374)입니다.


재위 기간은 1351~1374년.


왕위에 오른 뒤 중국 원나라를 배척하고 친원파인 기씨(奇氏) 일족을 제거하였고,


쌍성총관부를 폐지하였으며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였다는 업적이 있지요.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시기 왕들의 공통점은 왕 이름에 충(忠)자가 들어간다는 겁니다.


즉, 원나라에 충성을 다하라는 뜻이지요.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공민왕…. 어라?


공민왕은 왜 충민왕이 아니고 공민왕일까요?




공민왕의 반원 자주 개혁 - 고려인의 왕


고려의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충혜왕의 동생입니다.


11살 때 원나라에 가서 교육을 받고,


원나라의 노국 대장 공주와 결혼한 후 22살에 고려에 돌아와 왕이 되었습니다.


고려에 돌아왔을 때 공민왕이 무슨 일을 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민왕은 반원 자주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친원파의 우두머리인 기철을 제거했지요.


기철은 원나라에 공녀로 간 여동생이 아유시리다라이라는 아들을 낳고


원황후가 된 것을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며 악행을 일삼던 인물이었거든요.


기철이 강제로 빼앗은 넓은 땅과 많은 재산, 노비들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변발과 호복 등 몽골식 생활 풍습을 금지하고, 정동행성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해서 원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을 99년 만에 되찾았습니다.



몽골에 보내던 공녀와 환관도 더 이상 보내지 않았지요.


또한 원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각종 시호와 제도들을 다시 고쳤습니다.


즉 ‘충’자가 들어가는 왕의 시호를 바꾸었는데,


충렬왕은 ‘경효’, 충선왕은 ‘선효’, 충목왕은 ‘현효’라고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공민왕과 노국 대장 공주


타지마할이라는 아름다운 무덤을 알고 있나요?


인도의 샤자한이라는 왕이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무덤입니다.


공민왕은 노국 대장 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10년에 걸쳐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아내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는 공민왕은


아내가 죽고 난 후 “내가 공주와 함께 있기로 약속했다.”면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신돈과 전민변정도감 - 신돈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고려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강한 왕권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권문세족들을 제거해야 하는 큰 숙제를 풀어야 했지요.


공민왕은 이런 개혁을 함께해 줄 사람으로 신돈을 찾아냈습니다.



신돈은 권문세족과 거리가 먼 스님이었기 때문에 개혁에 적합한 인물이었지요.


신돈의 어머니는 옥천사의 노비였다고 하는데,


노비 출신은 당시 스님이 될 수 없었던 풍습을 생각할 때,


이 이야기는 아마 사실이 아닐 거라 추측합니다.



공민왕과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이라는 관청을 만들고 스스로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럼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이었을까요?


한자만 잘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밭 전(田), 백성 민(民), 변할 변(變), 바를 정(正), 그리고 도감은 관청이라는 뜻이지요.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거나 노비가 된 백성을 바르게 판단하여 토지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농장의 노비는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는 관청이라는 뜻 입니다.



노비 신분에서 양인으로 해방된 사람들은 땅을 얻어 열심히 농사를 짓고,


그 수확을 왕에게 세금으로 바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군대에도 가기 때문에 왕권이 강해지게 되지요.


반대로 권문세족들은 경제적인 기반을 잃어버리게 됐습니다.


백성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공민왕의 개혁 조치를 몹시 좋아했습니다.


신돈을 성인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까 말이죠.




개혁의 실패 -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백성들과 달리 권문세족들은 공민왕의 개혁에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빼앗길까봐 불안해 했지요.


기회를 틈타 공민왕과 신돈의 사이를 이간질하더니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으로 고하여 신돈을 처형하도록 했습니다.



공민왕은 신돈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돈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신돈과 함께 공민왕의 개혁을 지지해 줄 새로운 개혁 세력,


즉 신진 사대부의 세력은 아직 미약해서 왕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게다가 원나라 말기의 혼란을 이용해서 북에서는 홍건적이 내려와 개경까지 침입해 왔습니다.


공민왕은 개경을 버리고 안동까지 피난을 가야 했지요.


일본땅에서도 왜구들이 쉬지 않고 습격해 왔습니다.


나라 안과 밖이 모두 어수선한 가운데 공민왕은 더 이상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1374년, 신하의 칼에 살해당하고 말았지요.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실패로 끝난 이후 고려는 급속히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동참했던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고려는 조금씩 변화의 싹을 틔워 조선 건국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신돈! 개혁에 몸 바친 스님인가? 고려 말의 요승인가?


《고려사》라는 역사책에는 공민왕과 신돈이 정치를 못하고 타락한 왕,


나라를 망친 요망한 중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신돈이 노비 출신이라는 말도 있고,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사》는 조선 시대에 쓰인 역사책으로


고려의 멸망과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렇게 썼을 겁니다.


역사책에는 진실이 아닌 것들도 기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지요.


여러 가지 자료와 유물을 가지고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역사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