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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신진사대부 新進士大夫] 고려 말 새 세상을 꿈꾼 사람들

by 제이노엘 2017.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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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 입니다.



신진 사대부란, 원나라에서 들여온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개혁을 추진하던 세력 입니다.


신진 사대부의 사(士)는 선비나 학자를 말하고


신진 사대부의 대부(大夫)는 관료를 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천 원짜리 지폐와 더 좋아하는 오천 원짜리 지폐에는


근엄한 얼굴을 한 이황과 이이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릴적 저는 추석과 설날에 이분들을 뵐 때마다 무지 반가웠지요.


어른들께 이분들은 무얼 하신 분인지 여쭈어보니,


성리학을 공부한 학자들이라고 했었는데, 도대체 성리학이 뭐지?




성리학 - 우주의 근원은 무엇일까?



성리학이란 무엇일까?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때 주희라는 학자가 연구하여 정리한 유학의 한 갈래로, 주자학이라고도 부릅니다.


주자는 주희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기도 하지요.


이제까지 한자의 뜻을 해석하던 유학과 달리


성리학은 인간과 우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우주의 만물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인간은 본래 선하고 착한가, 아니면 악한가?”

“만물의 이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연구하지요.



성리학에서는 자연, 사람, 사회의 원리를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는데,


모든 것은 ‘기’의 움직임에 따라 태어나고 죽는다고 합니다.


이런 ‘기’의 근본을 이루는 게 바로 ‘이’ 라고 합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타고난 본성인 ‘이’를 따르면 도덕적이고 선하게 살게 된다고 전해지지요.



반대로 ‘기’를 따라 살게 되면 본능에만 충실한 악한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어렵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실은 아주 쉽습니다.


우리 모두 생활 속에서 도덕을 지키고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지요.


욕심을 버리고 타고난 본성을 잘 관찰하며 착하게 살면 세상이 이치에 맞게 움직인다는 것!




성리학의 도입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고려 말의 일입니다.


충렬왕 때 원나라에 갔던 안향이 《주자전서》라는 책을 가져다 연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후 백이정, 이제현, 권보, 우탁, 박충좌 등의 학자들이 함께 연구했다고 합니다.


이제현은 28살에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알렸고,


이색 역시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왔습니다.



고려 말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은 모두 이색의 제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성리학이 기울어져 가는 고려 사회를 바로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줄 거라고 믿었지요.


그리고 새로운 정치 질서와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권문세족과 불교의 문제점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권문세족 vs 신진 사대부



권문세족은 고려 말의 지배 세력으로, 원과 연결되어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사원과도 연결되어 부패를 일삼았습니다.


반면 새롭게 등장한 신진 사대부들은 지방의 향리 출신이 많았고,


주로 하급 관료로서 권문세족의 잘못과 사원 세력의 타락을 공격하면서 세력을 키웠습니다.



만권당은 어떤 곳일까?


충선왕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 1314년 원나라 연경에 세운 독서당입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학자들이 모여서 함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공부방이지요.


이곳에서 고려의 학자들은 학문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활동을 하였고,


조맹부 같은 한족 출신 학자를 초대하여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고 합니다.





신진 사대부 - 새 세상을 위한 개혁 세력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권문세족으로 인해 어지러워진 나라 기강을 바로세워


약해진 왕권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충선왕은 정치·경제 제도 개혁을 실시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충목왕도 개혁을 추진했지만 역시 실패했지요.


고려 국왕이 원의 간섭과 조종을 받고 있어서 개혁을 철저하게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정치 세력도 자주 바뀌어 개혁을 도와줄 만한 개혁 추진 세력도 부족했거든요.


그러나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새로운 유학을 배운 학자들에 의해서 고려 사회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공민왕 이후에는 성균관에서 유학을 공부한 학자들이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관직에 많이 진출했습니다.


이색, 정몽주, 김구용,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이존오, 정도전 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이지요.



이들은 권문세족과 달리 지방의 향리 출신들이 대부분입니다.


모든 관직을 독점한 권문세족 때문에 승진하기도 어려웠고,


많은 땅을 소유할 수도 없었던 신진 세력이었지요.


따라서 권문세족에 대한 불만이나 고치고 싶은 점이 많았습니다.



신진 사대부들은 원 세력을 등에 업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권문세족의 불법성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성리학에 따른 새로운 사회 건설을 주장했지요.


신진 사대부들은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힘을 보태고, 이성계와 함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결국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고려의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것이지요!





옛날에도 여인들이 화장을 했을까?


우리나라 화장의 역사는 단군 신화에서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쑥과 마늘이 피부를 하얗게 만들어 주는 음식이고,


또 동굴에 지내며 햇빛을 보지 않게 했던 것은


당시 피부가 흰 사람을 귀하게 여기던 관습을 보여 주는 거라 합니다.



삼국 시대에도 화랑이 화장을 했다거나, 여자들이 분과 연지를 발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벽화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얼굴은 희고, 입술은 붉은 모습을 하고 있지요.


특히 백제 사람들은 화장 기술이 뛰어났었다고 합니다.


불교문화로 목욕이 흔해지면서 쌀겨나 팥·녹두로 만든 비누, 향수나 향료로 목욕을 했다고 합니다.



고려 때는


“고려인은 화장을 즐기지 않는다.


분은 바르지만 연지는 사용하지 않고, 눈썹을 버드나무 잎처럼 가늘고 아름답게 그린다.


또한 비단 향료 주머니를 차고 다닌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 자연스럽고 은은한 화장을 좋아했던 것 같아보이는데,


화장품과 관련된 유물은 뭐가 있을까요? 


청동 거울과 화려하게 만들어진 청자 화장품 그릇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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