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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삼별초 三別抄] 몽골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by 제이노엘 2017.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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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 입니다.



고려가 몽골에게 땅따먹기에 당했을 무렵이 있었습니다. 


아시아 전체가 징기스칸에게 먹혔었지요.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나라는 어디일까요? 러시아. 딩동댕~


그렇다면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가 어딘 줄 아십니까? 바로 몽골입니다.


칭기즈 칸이 세운 몽골은 중앙아시아의 초원을 가로질러 멀리 동유럽의 헝가리까지 정복했었다고 합니다.


정말 싸움을 잘했나봅니다. 그런데 고려 사람들은 어떻게 몽골과의 전쟁에서 버틸 수 있었을까요?





몽골의 침입 - 여섯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


몽골과 고려의 첫 만남 - 강동의 역


고려가 무신 집권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중국에서는 칭기즈 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여 금나라를 공격하고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을 틈 타 금나라의 지배를 받던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켜 도망다니다가 고려를 침입했습니다.


고려는 몽골과 연합해서 서경 부근 강동성에서 거란족을 물리쳤는데, 이것을 강동의 역이라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몽골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몽골은 해마다 많은 공물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면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여진족이 고려인의 복장을 하고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이 사건으로 고려와 몽골의 국교는 단절됐지요.



몽골과의 전쟁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끝까지 성을 지켰고,


충주 지방에서는 관리들이 도망가자 노비들이 나서서 성을 지켰습니다.


반면 최씨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섬으로 들어갔지요.


다시 2차 침입이 시작되자 이번에도 하층민들이 더 적극적으로 몽골에 대항했습니다.



처인성 전투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는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후 6차까지의 전투에서 우리 민족은 지옥 같은 30년을 보내야 했고, 전쟁의 피해는 갈수록 심해졌지요.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 황룡사 9층탑 등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 버렸습니다.




몽고와 몽골, 어떻게 다르죠?


몽고는 중국인들이 몽골을 한자로 표기할 때 낮추어 부르던 표현이므로


몽골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몽고라는 말의 뜻은 무식하고 아직 잠에서 떨 깨어난 듯하다는 말이입니다.


몽골을 얕잡아서 부를 때 쓰는 말이라 합니다


한 민족을 뜻하는 말인데, 이렇게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겠지요?




몽골과 강화 - 몽골과의 강화로 독립을 유지하다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 피난해 있으면서도, 백성들을 외면한 채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세금을 거둬 백성들의 원망을 샀지요.


백성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데,


무신 집권자들은 강화도에서 편히 지내고 있으니 민심을 잃은 것은 당연한게 아니겠습니까?



몽골과 싸우자고 주장하던 최씨 정권의 최의가 피살당하자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전쟁을 끝냈습니다.


강화도에서 다시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제 고려의 왕자들은 원에서 교육을 받아야만 고려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몽골에게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고려라는 나라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어.




삼별초의 저항 - 끝까지 저항하라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왕과 신하들은 모두 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개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고 몽골에게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최씨 정권의 사병이었던 삼별초입니다.


배중손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을 뽑고, 관리도 뽑아서 반란을 일으켰지요.



강화도에서 싸우던 이들은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배를 타고 전라남도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서 싸웠습니다.


이때 진도로 떠나는 배가 무려 1천 척이었다고 하니 삼별초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알겠지요?



진도가 함락되고 배중손이 사망하자 이번에는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옮겨 항쟁했지요.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160척의 전함을 끌고 제주도에 모여들었고,


삼별초는 있는 힘을 다했으나 결국 진압됐습니다.


김통정은 부하 70여 명과 함께 한라산에서 목숨을 끊었다고 하니,


이렇게 삼별초의 난은 4년 만에 진압되었어.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킨 목적은 몽골에 대한 저항만은 아니었지만,


삼별초가 진압당한 후에는 아무도 몽골에 저항하지 않았지요.


따라서 삼별초의 저항은 고려인의 자주 정신을 보여 주었던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삼별초가 개경 환도에 반대한 이유는?


삼별초는 치안과 조세 징수 업무를 맡은 최씨 정권의 사병이었습니다.


강화도에서 무신 집권자를 호위하는 역할을 했고,


반란을 일으키는 백성을 도적이라며 잡아 가두었지요.


백성을 위한 군대가 아니라 최씨 정권을 위한 군대였기 때문에 혹시나 처벌받을까 두려워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개경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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