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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광해군] 뛰어난 외교 정책을 펼친 임금

by 제이노엘 2018.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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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 입니다.


왕이 된 남자 광해는 조선 15대 왕으로,


명과 후금 두 나라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펼쳤습니다.


당쟁에 휩쓸려 임해군과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시켰으며, 후에 인조반정으로 폐위가 되었습니다.



광해군의 정치 - 어려워진 나라를 다시 일으켰어


광해군의 등장


조선 시대 임금님들 가운데 광해군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임금님도 없을 겁니다. 


한편에서는 쫓겨난 임금 또는 폭군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중립 외교’를 펼친 현실적인 임금님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조선의 15번째 임금님인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후궁인 공빈 김씨가 낳은 아들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정하고 신하들과 함께 피난을 떠났지요. 


선조는 피난을 떠나면서 조정을 둘로 나누어, 일부는 선조를 따라 의주로 떠나도록 했고, 


일부는 광해군을 따라 함경도, 강원도 등으로 나아가 왜군을 막도록 했습니다. 


이때 광해군은 여러 지역을 찾아다니며 군대와 식량을 모아 왜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지요.



전쟁의 뒤처리에 나선 광해군


전쟁이 끝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뒷수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먼저 양전 사업을 실시해 토지 대장과 호적을 새로 만들어 세금을 걷을 수 있도록 했지요. 


그리고 국가의 위신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에 탄 궁궐을 새로 고쳤으며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국방을 튼튼히 했지요.



또 《동의보감》도 편찬하게 했습니다. 


특히 이 책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들을 이용한 의학책으로, 일반 백성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로 권력을 잡고, 우리나라와 다시 국교를 맺자고 간청해 왔습니다. 


그 결과 정기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이 요청하는 학문과 기술, 문화를 전해 주었지요.



중립 외교 -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했어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있을 무렵, 중국에서는 명나라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틈을 타 만주에서는 여진족들이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명나라에 전쟁을 선포했지요. 


그러자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베푼 은혜를 강조하며 조선에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조선의 신하들은 대부분 명을 위해 군사를 보내야 한다고 했지요.



하지만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당시 중국 땅에서는 명나라가 점점 기울어가고, 오랑캐로 깔보던 후금이 커나가고 있었거든요. 


이때 조선이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면 또 전쟁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걸 광해군은 알았던 거지요. 


그래서 광해군은 명나라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후금의 불만을 막을 수 있는 자주적 실리 외교에 힘썼습니다.



광해군은 명의 요구대로 원군을 파견하되, 후금의 미움도 사지 않는 중립을 찾았던 겁니다. 


원군이 떠나기 전날 밤 지휘관인 강홍립을 조용히 불러 


“만일 이 싸움에서 명나라가 진다면 조선은 후금의 노여움을 살 것이니, 싸움의 형세를 현명히 판단하여 중립을 지키도록 애써라.”


라고 말했습니다.



광해군의 예상대로 명나라가 패하자, 강홍립은 조선군의 출병은 명의 요청에 의한 부득이한 것임을 밝히고 후금에 항복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를 선택한 광해군 덕분에 조선은 또 한 번의 전쟁 위기를 극복한 겁니다.



인조반정 - 왕위에서 쫓겨났어


그런데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반대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특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서인들은 ‘군주가 은혜를 몰라서는 나라가 설 수 없다.’며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는데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합니다. 


광해군이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한 것도 인조반정의 또 다른 이유입니다.



폐모란 선조의 두 번째 왕비인 인목 대비를 일반 백성으로 신분을 낮추고 서궁에 유폐시킨 일이고, 


살제란 배다른 동생인 영창 대군을 죽인 일입니다. 


이 일을 기회로 신하들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고, 인륜을 어겼다며 광해군을 왕위에서 쫓아냈습니다. 


이후 역사 속에서 광해군은 뛰어난 외교 전문가보다는 폭군으로 등장하게 되지요.


광해군은 조선을 또 다른 위기에서 구했지만 왕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그 무덤은 너무나 쓸쓸하고 초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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