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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병자호란] 형제의 나라에서 신하의 나라로!

by 제이노엘 2018.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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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 입니다.


오락실에서 던전드래곤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은기사 금기가, 빨간도둑 파란도둑, 초록엘프 파란엘프, 쾌남성직사 대머리성직자, 드워프도 있었는데 색은 잘 모르겠네요


법사는 검은법사 초록법사가 있었죠.


검은법사가 항아리 같은 마법을 쓸 때 외치는 주문입니다.


병자호란~!


서론이 넘 길었죠? 



호란(胡亂) - 북쪽 오랑캐의 침입


후금이 쳐들어와 호란이 일어났어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왕으로 세운 서인들은 망해 가는 명과 친하게 지내고 새롭게 일어나는 후금을 멀리했습니다. 


그러자 후금은 광해군의 복수를 한다며 1627년 조선에 형제 관계를 요구하면서 침입했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입니다. 조선은 하는 수 없이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후 명나라를 무너뜨린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이제부터 조선은 ‘신하의 나라’라며 청나라에 신하로서 예를 갖추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때 신하들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적당히 얘기하여 화해를 하자는 주화파로 나뉘었지요.



결국 조선은 척화파의 주장이 우세하여 만주족을 야만족이라 무시하며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청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다시 침입했지요. 이것이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입니다.



막강한 청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한양 근처까지 쳐들어 왔고, 


놀란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대항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차츰 먹을 것이 떨어지고 청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만 것 입니다.




임금은 굴욕적으로 항복하고, 백성들은 전쟁의 고통을 떠안다


한겨울에 먼 길을 걸어 삼전도에 있는 청 태종 앞에 도착한 인조는 항복의 예로써 ‘3배 9고두’를 해야만 했습니다. 


3배 9고두란 상복을 입고 3번 큰절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꽝꽝 박아 


그 소리가 단 위에 앉아 있는 청 태종에게 들리게 하는 것으로, 3배 9고두를 마친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백성들은 또다시 전쟁의 고통을 겪어야 했고, 조선은 청의 신하 나라가 되었습니다.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 척화파 등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지요. 


소현 세자는 청에 머무는 동안 청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어 조선에 도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죽으면서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 대군이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효종입니다.



소현 세자는 독살되었을까?


소현 세자는 인조의 맏아들로, 14살에 세자가 되었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동생 봉림 대군과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지요.



이후 9년간 심양에 있으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며, 


조선인 포로의 해방과 정치·경제적 문제들을 처리했습니다. 


소현 세자는 1644년 베이징에 갔다가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서양의 과학과 천주교에 눈떴다고 합니다.



하지만 청나라에 굴욕적으로 항복한 인조는 이런 소현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1645년 귀국했을 때는 차갑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소현 세자는 돌아온 지 2개월 만에 34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당시 그의 시신이 전부 검게 변해 있었고, 7곳에서 피가 흘러 나와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고 합니다. 


정말로 소현 세자가 독살되었다면 누가 그를 죽였을까요?



효종의 북벌 정책 - 오랑캐를 정벌하려고 준비하다


그동안 오랑캐라고 깔보던 만주족이 세운 청에게 임금님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항복하고, 


왕자들이 인질로 끌려간 것은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청나라에 복수를 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인질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소현 세자가 갑자기 죽은 후 


왕위(효종)에 오른 봉림 대군은 청나라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효종은 조정에서 청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세력을 몰아내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 정책을 추진했지요. 


‘북벌’이란 청을 정벌하여 문화가 높은 조선이 문화가 낮은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내 우리를 구해 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주장이입니다.



효종은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어영청을 중심으로 새롭게 군대를 만들고, 


이완 대장에게 군사 훈련을 맡겨 6백여 명이던 군사를 1천여 명으로 키웠지요. 


남한산성에 있는 수어청을 정비하여 한성 외곽의 수비를 튼튼히 하기도 했습니다. 


또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 등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조총과 화포 등의 신무기를 도입하고, 화약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북벌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북벌을 위해 군사력을 키우려면 세금을 많이 걷어야 하고, 이것은 두 차례나 전쟁에 시달린 백성의 부담을 증가시켰기 때문입니다. 


결국 북벌 정책은 효종의 죽음으로 10년 만에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하멜 표류기》가 뭐예요?


1653년 7월 30일, 일본으로 가던 네덜란드 배가 제주도에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배에 탔던 선원들은 조선에 머무르게 되는데, 그중 한 사람이 하멜입니다. 


하멜은 서울로 압송된 후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전라도 강진과 여수 등지에서 일하며 


조총과 신무기 등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1666년 9월 30일, 하멜은 7명의 동료와 함께 조선을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 네덜란드로 돌아갔지요.



그리고 귀국 후, 13년 20일 동안의 조선 억류 경험을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쓴 것 입니다. 


이것은 한국을 서양에 소개한 최초의 책으로, 당시 유럽인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또한 당시 조선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생활 등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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