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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상평통보] 전국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화폐

by 제이노엘 2018.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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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 입니다.



상평통보란 조선시대 쓰던 엽전을 말합니다. 참 쉽죠?


오늘 이야기 끝! 


은 아니고


화폐가 없던 시절에는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 사람들끼리 물물 교환을 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쌀이나 비단으로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했지요. 


하지만 점차 가지고 다니기 편하고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화폐가 필요해졌습니다. 


그러다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한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화폐가 널리 쓰였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 조선 시대의 화폐에 대해 알아볼까요?



민간 수공업 발달 - 자유로운 생산 활동


조선 후기에는 농업뿐 아니라 상업과 수공업도 크게 발달했습니다. 


처음 수공업자들은 관청에 소속되어 관청에서 필요한 의류, 활자, 화약, 무기, 그릇과 같은 물건들을 만들었지요. 


하지만 조선 후기로 오면서 수공업자들이 관청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생산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수공업자들이 내는 세금인 장인세만 부담하면 비교적 자유롭게 물건을 만들 수 있었고, 


그들이 만든 제품은 관청에서 만든 것에 비해 품질과 가격 면에서 훌륭했습니다.



민간 수공업자의 작업장을 흔히 점(店)이라 했는데, 철점, 사기점, 유기점 등이 있었습니다. 


민간 수공업자들은 작업장이나 경제적 기반이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돈 많은 상인들로부터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하기도 했지요.



자유 상인의 대두 - 자유로운 상업 활동


조선은 건국했을 때부터 농업을 중요하게 생각한 반면, 상공업을 천한 직업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 수공업이 활기를 띠면서 


상인들은 수공업자로부터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제품을 사들인 후 


그것을 나라에 팔아 이익을 얻거나, 한 가지 물품을 대량으로 사들여 도매업을 하는 등 대규모로 장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공인과 자유 상인들 덕에 상업이 크게 발달했지요. 


공인이란 왕실·궁궐·관청에서 필요한 각종 물품을 전국의 산지에서 직접 사서 대던 특권 상인입니다.



그리고 금난전권이 폐지되면서 서울을 비롯한 개성, 평양, 의주, 동래 등에서는 


경강 상인, 내상, 만상, 객주, 선상 등 자유 상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청나라나 일본과도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 있었는데, 


이런 나라 간의 거래에서는 ‘송상’이라 불린 개성상인들의 활동이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은행이 있었나요?


조선 후기에 들어 포구도 새로운 상업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곳을 거점으로 ‘객주’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객주는 다른 지역에서 온 장사꾼들이 묵어갈 장소를 제공해 주기도 하고, 


장사꾼의 물건을 맡아 팔거나, 물건을 팔 사람과 살 사람을 연결해 주고 대가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그 밖에 물건을 보관해 주고 돈을 받는 창고업이나 물건을 실어 나르는 마차나 배를 소개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객주는 많은 사람과 물건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주기도 하고, 


요즘의 수표와 비슷한 어음을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또 저금을 하면 약간의 이자를 붙여주기도 했다는데, 오늘날의 은행과 비슷하지요?



장시의 발달 - 활기찬 시장


조선 후기에 자유 상인들이 많아진 이유는 전국적으로 발달한 장시 때문이기도 합니다. 


15세기 말에 남부 지방에서 열리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에 들어서는 전국에 1,000여 개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장시에서는 인근의 농민, 수공업자, 상인들이 일정한 날짜, 일정한 장소에 모여 물건을 교환하였는데 보통 5일마다 열렸습니다.


농민들은 곡식과 부인들이 짠 베를 들고 나오고, 


땔나무를 지고 온 나무꾼이나 이 장 저 장 물건을 지고 떠돌아다니는 보부상이 모이는 등 


장시에는 온갖 사람들과 물건들이 넘쳐났지요.



특히 보부상은 각 지방의 큰 장시를 하나로 연결시키고,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장시 중에서도 광주의 송파장, 은진의 강경장, 덕원의 원산장, 창원의 마산포장 등은 큰 중심지로 발돋움했습니다.



한편 장시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밥장수, 떡장수 같은 장사꾼들이 모일 뿐 아니라 거지떼의 각설이 타령, 사당패의 놀이마당도 벌어졌습니다. 


이처럼 장시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사교 장소이자 세상을 이야기하는 장소가 되었던 겁니다.



상평통보 - 옷감, 쌀 대신 화폐를 사용했어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편리한 거래를 위해 화폐 사용도 활발해졌습니다. 


그래서 ‘상평통보’라는 동전이 만들어졌지요. 


상평통보는 인조 때 처음 만들어졌지만 잘 쓰이지 않아 없어졌다가, 숙종 때(1678년)부터 약 200년 동안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 화폐 역사상 전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동전이지요. 


이제 조선은 본격적으로 화폐 시대를 맞이한 겁니다.



상평통보의 단위는 1문(푼)이라고 했는데, 10푼이 1전, 10전이 1냥, 10냥이 1관이었고, 관이 최고 단위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1냥은 약 2만 원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동냥하는 사람들이 ‘한 푼 줍쇼.’라는 말을 하지요? 


이때 한 푼은 조선의 화폐 단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약 200원 정도 되는 셈이지요.



상평통보가 처음 나왔을 때, 백성들은 조그만 동전으로 쌀이나 옷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해 사용하기를 꺼렸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세금이나 죄를 지은 사람들의 벌금을 상평통보로 받았지요. 


이런 노력과 더불어 상업이 발달하면서 18세기 후반부터는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쓸 수 있는 돈인 상평통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상평통보에는 왜 구멍이 뚫려 있나요?


상평통보는 엽전이라고도 해. 상평통보를 만드는 틀이 나뭇가지 모양이었기 때문입니다. 


만드는 과정을 보면 나뭇가지 끝에 상평통보가 잎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것을 하나씩 잘라 다듬으면 모양이 매끈한 화폐가 되었지요.



한편, 상평통보의 둥그런 모양은 하늘을, 네모난 구멍은 땅을 본뜬 겁니다. 


그런데 왜 돈에 구멍을 뚫었을까요? 


옛날에는 지갑이 따로 없어서 들고 다니기 불편했어요. 


그래서 상평통보의 구멍에 실을 꿰어 옆구리에 차고 다닐 수 있게 구멍을 뚫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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