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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탕평책] 인재를 고루 뽑아 탕탕평평

by 제이노엘 2018.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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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 입니다.



영조의 탕평책 - 싸우기만 하는 붕당 정치는 그만!


끼리끼리 모여서 하는 정치, 붕당 정치


조선 후기에는 정치하는 사람들 간에 서로 무리를 지으며 편이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정치 무리를 ‘붕당’이라고 하지요. 처음에는 붕당에 속한 사람들도 다른 편을 서로 인정해 주며 사이좋게 정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상대 당에 대한 올바른 비판은 사라지고, 


점차 모함이나 부정적인 비판으로 바뀌면서 붕당 간의 정치적 싸움이 치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조의 강력한 탕평책


영조 임금은 신하들끼리 편을 갈라 자기들만의 이익을 좇는 상황이 


왕권을 약하게 만들고 조선을 망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붕당 간의 싸움을 억누를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을 실시하기로 했지요.



즉, 모든 당이 싸우지 않고 정치에 골고루 참여할 수 있도록 ‘탕평책’을 실시하기로 한 것 입니다. 


영조가 워낙 강하게 탕평책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각 붕당에 속한 신하들은 영조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당파 중 능력 있는 인물들이 골고루 뽑혀서 영조의 명령에 따라 여러 개혁 정치를 이루어 냈지요.



왜 영조는 사도 세자를 뒤주에서 죽게 만들었을까?


강력한 탕평책을 실시한 영조도 붕당 세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세자를 미워했던 정치 세력(노론)들의 이간질로 영조는 늦은 나이에 얻어 끔찍이도 사랑하던 아들을 미워하게 됐고, 


결국 영조 자신이 손수 다음 대를 이을 아들인 세자를 뒤주 속에 8일 동안 가두어 굶어 죽게 했지요.



당파 싸움을 없애려고 노력했던 영조마저도 당파 싸움에 휘말려 불행한 가족의 역사를 만든 것 입니다. 


훗날 영조는 자신의 행동이 지나쳤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아들은 저 세상으로 가고, 


잘못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정말 비극이지 않습니까?



정조의 탕평책 - 젊은 학자를 모아서 새로운 개혁을 해 보자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딛고 일어선 개혁 정치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영조의 대를 이을 사람으로 사도 세자의 아들이 정해지지요. 


그가 바로 정조 임금입니다. 


당파 싸움에 휘말린 아버지가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지켜 본 정조는 


임금이 되자마자 할아버지 영조의 정책이었던 탕평책을 더욱 열심히 실시했습니다.



정조는 왕권이 강해야 신하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펴게 됩니다. 


세자 시절 자신을 미워하던 당에 의해 몇 차례 죽을 고비까지 넘긴 정조는 우선 왕의 직속 부대인 ‘장용영’이라는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이라는 정치 기구를 마련해 정조가 실행하고자 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세력을 키워나갔지요.


이것을 바탕으로 나라 살림 또한 윤택하게 만들고 백성을 안정시키기 위한 경제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우선 농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애썼지요. 또 광산도 적극적으로 개발해 이 시기에는 조선의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게 됐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신경을 많이 써서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규장전운》 등 수많은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정조의 노력 덕에 정조가 통치하던 시대에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백성들의 살림도 전보다 많이 나아졌어. 또 문화도 크게 발달했지요.



정조와 화성


한편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 세자를 늘 그리워했던 효자 정조는 


사도 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그 지역 일대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 뒷면에는 정조의 정치적인 의도도 깔려 있었습니다.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면 권력이 집중된 한양을 떠나 수도를 옮기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거지요. 


또 자신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정조의 정통성에 약점이 되었거든요.



수원으로 묘를 옮긴 후 정조는 그곳에 계획 도시인 화성을 세우고 


아버지 묘에 성묘를 하기 위해 거의 매년 수원에 행차를 했습니다. 


이런 정조의 모습은 백성들에게도 효의 상징처럼 여겨졌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때 임금이 행차하던 모습과 절차를 그려 놓은 그림이 〈화성행차도〉로 남아 있습니다.



수원의 ‘지지대 고개’가 정조와 연관이 있다면서요?


지금의 수원에서 의왕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보면 ‘지지대 고개’라는 곳이 있어. 


그런데 이 고개가 정조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가? 


지지대 고개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 세자에게 성묘하고 돌아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바로 이곳이 사도 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이 보이는 마지막 고개였다고 합니다. 


이 고개를 넘으면 더 이상 아버지의 무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천천히 가라고 명령을 내렸답니다. 


그래서 훗날 이곳을 더딜 지(遲)자를 써서 ‘지지대 고개’라고 불렀습니다. 


고개 이름에서도 정조의 애절한 효성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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