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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모내기법] 수확량은 2배, 노동력은 절반!

by 제이노엘 2018.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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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 입니다.


우리가 해먹는 쌀밥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마님은 왜 돌쇠에게 쌀밥을 주었을까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전쟁터로 변해버린 나라 안은 농사짓기가 힘들어져서 백성들의 생활은 고되고, 먹고 살기도 어려워졌지요. 


그래서 나라와 백성들은 농촌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벼농사에서 수확량은 2배로 늘리고, 


노동력은 절반으로 줄여 주는 농사법이 전국적으로 퍼지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게 뭘까 궁금하지요?



이앙법 - 모내기가 전국적으로 퍼지다


모내기가 뭘까?


15세기까지만 해도 농민들은 모내기를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벼농사를 지을 때는 논에다 볍씨를 직접 뿌리고, 계속 그 자리에서 벼를 길렀지요. 


그런데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벼농사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앙법’이 널리 퍼졌습니다.



‘이앙법’이 뭐냐고? ‘이앙법’은 쉬운 말로 모내기법이라고 하는데, 


모판을 만들어 볍씨를 촘촘하게 뿌리고 싹을 틔워 일정하게 자랄 때까지 키운 다음 물을 댄 논에 옮겨 심는 방법입니다.



모내기는 고려 말부터 해 왔지만 조선 초기에는 나라에서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뭄에 약했기 때문이지요. 모내기를 하려면 논에 물이 있어야 하는데, 


가뭄이 들어 물이 부족하면 모를 한 포기도 심을 수 없어 그 피해가 모내기를 하지 않았을 때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대신 볍씨를 직접 뿌려 가뭄의 피해를 덜 받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 농민들이 저수지를 늘리고 수리 시설을 확충하면서 본격적으로 모내기법을 이용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요.



모내기법을 이용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우선 벼 포기 사이를 넓게 심기 때문에 그 사이의 잡초를 뽑기(김매기)가 쉬워, 일손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모내기법으로 노동력이 절감되자 한 농가에서 예전보다 더 넓은 땅을 농사지을 수 있게 되면서 부유한 농민들도 생겼지요.



또 모내기 과정에서 나쁜 모를 골라내고 튼튼한 모만을 옮겨 심어 수확량을 2배로 늘릴 수 있었습니다. 


또 모내기 덕에 같은 논에서 벼와 보리를 동시에 재배할 수 있게 됐습니다. 


모내기를 하지 않고 논에다 직접 씨를 뿌리면 보리를 재배할 수 없었거든요. 


보리를 수확하기 한 달 정도 전에 볍씨를 뿌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내기를 하면 하나의 논에서 벼와 보리를 연이어 재배하는 이모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보리를 수확하는 동안 모판에서 모를 키우고, 보리 수확이 끝난 논에 물을 댄 다음 모를 옮겨 심었지요.



골뿌림법 - 밭농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어


밭농사에서도 ‘골뿌림법(견종법)’이 널리 퍼져 노동력은 준 반면 수확량은 많게는 다섯 배까지 뛰었습니다. 


골뿌림법이란 밭두둑을 높게 만들어 고랑에 씨를 뿌리는 방법입니다.


골뿌림법을 이용하면 잡초를 쉽게 제거할 수 있어 노동력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또 추위와 가뭄에 잘 견디고 바람을 막아 종자를 보호할 수도 있어서 이앙법과 마찬가지로 수확량은 커지고 노동력은 줄어든 거지요.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새로운 농사 방법이 등장하면서 


한 사람당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의 면적이 늘어나 농촌에서는 빈부 격차가 커지고, 


소작농이나 날품팔이로 전락하는 농민도 생겨났습니다. 


또 일부는 농촌을 떠나기도 하면서 농촌 사회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인삼, 담배 재배 - 상품 작물로 부자가 되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란 말 때문에 담배가 우리나라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지요? 


하지만 담배는 임진왜란 전후에 일본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조선은 쌀농사에서 벗어나 수익이 높은 담배를 상품 작물로 재배하기 시작했고, 


상품 작물 재배는 농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지요.



담배 외에 파, 마늘, 오이, 삼, 모시, 생강, 인삼, 약재, 목화 등도 상품 작물로 재배하면서 농가의 수입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고구마가, 청나라에서는 감자가 들어와서 


흉년으로 굶주림이 심할 때 밥 대신 먹을 수 있는 구황 작물로 재배되었습니다.



담배에도 위아래가 있다?


담배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에는 남령초, 담바고라고 불렀습니다. 


남령초란 남쪽 국가에서 들어온 신령스런 풀이라는 뜻으로, 


‘가래가 목에 걸려 떨어지지 않을 때나 소화가 되지 않을 때 피우면 좋다.’는 기록처럼 약초로 여겨졌습니다. 


담배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신분이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피울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4,5세 아이들도 피웠다고 합니다.



이처럼 흡연 문화가 자리를 잡아가자 여기에도 신분 차별이 끼어들었습니다. 


원래 신분 사회에서의 문화란 게 하나부터 열까지 신분 차별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양반들이 이런 흡연 습관을 그냥 둘 리 없었지요. 


결국 ‘어른 앞에서는 피우지 마라, 평민이나 천민이 양반 앞에서 피우지 마라, 여자는 남자 앞에서 피우지 마라.’와 같은 규율을 만들었습니다. 


또 담뱃대의 길이에도 제한을 두어 양반은 긴 장죽을, 상민은 곰방대를 쓰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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