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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실학]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실용적인 학문

by 제이노엘 2018.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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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 입니다.



실학의 등장 -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학문!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가난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유학자들은 실생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론과 예법을 둘러싸고 논쟁하며 대립했지요. 


이때 어떤 학자들은 당시의 학문이 백성들의 삶에서 멀어진 것을 비판하면서 실제로 백성들이 잘살 수 있고,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생각하고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실생활에서 잘 쓰이고,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이용후생의 학문인 실학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연구한 학자들은 실학자라고 해. 실학자들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서양 문물의 전래 - 이것은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


실학이 생겨난 배경 중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서양의 여러 가지 문물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점이지요. 


조선 후기 연행사들은 중국에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고, 과학 기술책도 읽으며 서양 문물을 일찍 접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소개하기도 했지요. 이때 들어온 대표적인 서양 문물이 〈곤여만국전도〉, 자명종, 천리경 등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중국 외에도 넓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서양 문물들은 모두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들이라 실학의 발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요.



한편 서양 문물의 과학성과 실용성에 크게 놀란 실학자들은 스스로 그러한 물건을 만들어 보기도 했는데, ‘혼천 시계’가 대표적입니다. 


1669년 송이영이 만든 혼천 시계는 실내에서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고 


천체 운동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해 주는 시계로, 서양식 자명종의 원리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중농학파 - 농촌을 살려야 한다


실학은 18세기에 들어서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학파와 상공업을 중시하는 중상학파로 발전했습니다. 


먼저 중농학파를 알아볼까요?



중농학파는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로, “토지는 천하의 큰 근본입니다. 


큰 근본이 확립되면 온갖 법도가 따라서 잘 되어 하나라도 잘못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 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자세히 알아볼까요?



먼저, 유형원은 《반계수록》이라는 책에서 토지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토지 제도를 바꿔 실제로 농사짓는 사람에게 땅이 돌아가도록 


관리, 선비, 농민 등 다양한 신분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 주자고 주장했습니다.



농업 중심 개혁론을 더욱 발전시킨 이익은 《성호사설》이라는 책에서 


“백성들을 잘살게 하려면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주고, 아무도 그 땅을 함부로 팔거나 사지도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걸 어려운 말로 ‘한전론’이라고 합니다.



‘한전론’이란 각 집마다 사고팔 수 없는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하고, 


영업전 이외의 토지는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도록 하는 토지 제도입니다. 


여기서 영업전은 농민이 적어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최저 생활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하여 5백여 권에 이르는 저서를 남긴 정약용도 토지 제도와 세금 제도를 바꿀 것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농사짓는 땅을 농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하여, 함께 경작하고 수확물도 농사를 지은 노동량에 따라 똑같이 나눌 것을 주장했지요.



정약용이 말한 토지 제도 개혁안(여전론)은 당시의 사회에서는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정약용은 농업 외에도 과학 기술과 상공업 발달에 많은 관심을 보였지요. 


또한 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북학파, 중상학파 - 청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


앞에서 알아봤던 것처럼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 아니라 상업과 공업도 발전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을 펴야 한다는 실학자도 등장하고, 공업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도 나타났지.


이들은 “상공업을 두고 가장 천한 직업이라고 하지만 본래 더럽고 부정한 직업은 아닙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물품 교역에 종사하면서 자기 힘으로 먹고 사는 것인데, 


그것이 어찌 천하거나 더러운 일입니까?”라며 상공업을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기도 했지요. 


이들을 중상학파 또는 북학파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유수원,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이 있지요. 이들의 주장도 자세히 살펴볼까요?



상공업 중심 개혁론을 가장 먼저 말한 사람은 유수원입니다. 


그는 《우서》에서 상공업을 발전시킬 것과 기술 혁신을 강조했습니다. 


또 모든 직업을 평등하게 대할 것을 주장했지요. 


이어 홍대용은 청을 오가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의산문답》을 저술하고, 


평소 자신이 생각하던 기술의 혁신을 주장했으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했습니다.



한편 박지원은 양반이면서도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의 소설을 써서 당시 양반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했습니다. 


또한 《열하일기》를 통해 청의 여러 가지 제도와 생활 풍습을 소개하면서, 


적극적으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습니다. 


수레와 선박을 많이 이용해야 한다는 것과 상공업의 발전을 위해 화폐가 널리 쓰여야 한다고도 말했지요.



이와 같은 박지원의 실학 사상은 그의 제자 박제가에 의해 더욱 발전했습니다. 


서얼로 태어나 온몸으로 차별을 겪었던 박제가는 정조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된 후 여러 차례 청에 다녀왔지요.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북학의》를 저술했습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청의 문물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청과 무역을 더 많이 하여 상공업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반과 농민, 수공업자, 상인 모두가 잘살기 위해서는 소비를 많이 해 물자가 계속 돌고 돌아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처럼 실학은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것을 연구하는 실용적인 학문으로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나요?


옛날 사람들은 하늘과 땅이 어떤 모양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우리의 조상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고 네모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 우리나라에서도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타났지요.



소설 《구운몽》을 쓴 김만중은 가장 먼저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어 연행사로 중국에 가서 선교사들을 만나 천문학과 서양의 자연 과학을 접하게 된 홍대용은 


조선으로 돌아와 지구는 둥글고,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지요. 


특히 이러한 주장은 당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 사상에서 벗어나 


우리나라도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구 - 우리 역사와 땅, 언어를 연구하자


조선 후기에는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고, 관심이 커지면서 다양한 역사책이 편찬되었습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한치윤의 《해동역사》, 유득공의 《발해고》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역사책입니다.



특히 유득공은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함에 이르러, 


김씨가 남쪽을 소유하고 대씨가 북쪽을 소유하여 발해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남북국이다.”라며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에 포함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발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만주 지방까지도 우리 역사에 포함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게 된 것 입니다.



지리학에서는 이중환이 《택리지》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지리책이 아니라 직접 우리 국토 곳곳을 누비며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자연환경, 경제 생활, 풍속, 인심 등을 쓴 조선 시대판 《문화유산답사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김정호가 직접 해안을 걸어 다니고 높은 산에 오르며 완성한 《대동여지도》에는 


산맥과 하천, 포구, 도로 등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어 오늘날의 지도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합니다.



이 시기에는 우리말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습니다. 


유희의 《언문지》가 대표적이지요. 


유희는 우리 한글이 우수하다는 것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했고, 한글을 ‘언문’이라 깔보던 양반들을 비판했습니다.



이외에도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물고기를 연구하여 《자산어보》를 저술하였고, 


김정희는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연구하다가 북한산에 있는 비석이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실학자들 대부분은 권력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실학의 학풍이 국가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지는 못했습니다.



더 알아보기! 정말 김정호가 역적으로 몰려 죽었나요?


우리나라 지도 제작의 최고 인물인 김정호는 어렸을 때부터 지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지도를 제작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61년 우리나라 전체를 그린 〈대동여지도〉를 완성했지요.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어 잘못 알려진 설들도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자신이 만든 지도를 흥선 대원군에게 바쳤는데, 


대원군이 관심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나라의 비밀을 팔아먹은 역적’이라는 누명을 씌워 


지도를 새긴 판목도 불살라 버리고 김정호는 옥에 가둬 결국 죽고 말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의 판각이나 인쇄본이 전해 오고, 그를 후원했던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은 점 등을 볼 때, 


일제에 의해 조작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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