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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묘청] 고려인의 자주의식을 보여준 반란

by 제이노엘 2017.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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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 입니다.



머털이와 누더기도사. 꺼꿀이와 왕지락도사.


그리고 제자들이 공통된 한 여인을 사랑하는 이야기.


그 주인공은 바로 묘선이!



묘선이는 아니고 묘청이가 나왔네요.


묘청이가 누구일까요?




행복 도시를 아십니까?


충청도에 만들고 있는 행정 중심 복합 도시를 말하는 거라 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정말 행복이 넘쳐흐를 것 같지요?


그런데 어떤 어른들은 이렇게 행복한 도시로 수도를 옮기는 걸 반대한다 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옛날에도 수도 이전을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풍수지리설 - 땅을 보면 미래가 보인다


신진 세력의 등장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에 타버리자 왕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문벌 귀족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지요.


특히 이자겸이 그동안 주장했던 금나라와의 친선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자겸은 김부식과 함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면서 형제의 맹약을 맺었습니다.


이 때문에 고려 초부터 추진하던 북진 정책이 중단된 거 기억하지요?



이자겸에 대한 불만은 금나라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문벌 귀족 때문에 승진할 수 없었던 신진 세력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왕에게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지요.


왕 또한 신진 세력과 손잡고 문벌 귀족을 모두 없애고 싶어했습니다.




풍수지리설의 유행


풍수지리설은 산세나 지형에 따라 인간에게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리고 일단 좋은 땅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기운이 약해지기도 하고, 다른 땅에 좋은 기운이 생기기도 한다죠?



풍수지리설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등장해서 자주 민심을 현혹시켰는데,


이자겸의 난 직후에도 풍수지리설이 성행했어.


“개경(개성)은 지덕이 쇠하여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말은 앞에서도 한 적이 있지요?


궁궐이 불에 타고 나니 왠지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면서 세상은 더욱 어수선해졌습니다.





명당이 어디죠?


명당은 땅 속에 수맥이 흐르지 않고, 땅 위의 기운이 한곳에 모일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방에 기를 막는 나무나 물이 없어야 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을 명당이라고 하지요.


명당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한다고 하니, 요즘에도 묏자리를 정할 때 풍수지리가 이용되고 있습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 묘청 대 김부식


서경 출신의 신진 세력인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서경 천도 운동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개경 출신의 문벌 귀족들이 금나라와 가까이 지내고 요구를 들어주는 것에 반대하며,


다시 북진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었구요.


신진 세력인 정지상, 백수한 등과 뜻을 같이 하며 왕에게 건의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왕 때문에 서경 천도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묘청은 나라 이름을 ‘대위국(큰 일을 한다는 뜻)’, 연호를 ‘천개(하늘이 열린다는 뜻)’라고 하고,


나라 안에 또 다른 나라를 만들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에 맞서 개경에서는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토벌군을 조직했습니다.


묘청 군대의 힘이 많이 약해지자 조광이라는 사람이 묘청의 목을 베어 김부식을 찾아왔지만,


김부식은 묘청의 군대를 모조리 죽여 버릴 생각이었어. 결국 김부식의 토벌군은 1년여 만에 반란을 진압했지요.



반란 진압이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개경의 귀족 세력에 반대하는 서경의 농민들이 합세해서 반란군을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서경 천도 운동은 지방의 신진 세력인 서경파 묘청과


개경의 중앙 귀족 출신인 김부식이 대립한 권력 다툼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다툼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금나라에 대한 고려인의 자주 의식을 보여준 사건이었거든요.


그리고 1년 동안 이어진 서경 백성들의 저항을 통해 귀족들에 대한 백성의 저항 의식을 엿볼 수 있었지요.


그래서 일제 시대 역사학자였던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조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같은 호칭, 다른 사람




같은 호칭으로 불리지만, 시대에 따라 다른 일을 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내관은 환관, 도살업자는 양수척 또는 화척이라고 불렸지요.




고려 시대의 결혼 풍습은?


고려 시대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결혼했습니다.


여자는 18세, 남자는 20세쯤 결혼을 했지요.


결혼하면 여자가 시댁으로 들어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내의 친정집에서 살면서 자식을 낳아서 키우다가 나중에 시댁으로 갔다고 합니다.


가까운 친척끼리 결혼하기도 하고, 같은 성씨끼리 결혼을 하기도 하고, 총각이 과부와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구요.


유교 윤리가 발달했던 조선 시대에 비해서 훨씬 자유로웠던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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