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과거] 조선 시대의 수능 시험

by 제이노엘 2018. 4. 30.
728x90
반응형

안녕하세요, 제이노엘 입니다.



예전에 학교에서 사회 시험을 보았어요.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가슴이 두근두근!! 무슨 문제가 나올까?


친구들도 공부를 많이 한 것 같고, 엄마한테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100점을 맞겠다고 다짐하며 집을 나섰지만,


막상 학교에 오니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도대체 시험은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조선 시대의 어린이들도 학교에 다녔을까요? 그리고 우리들처럼 학교에서 시험을 보았을까요?




교육 기관 - 조선 시대의 학교를 알아볼까?


조선 시대에도 7~8세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조선에서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라는 시험을 보아야 했어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해야 했지요.


그렇다면 조선 시대에는 어떤 학교가 있었을까요?



조선 시대 어린이들은 7~8세가 되면 서당에 다녔습니다.


서당은 주로 양반 가문의 문중이나 유력가가 세웠지요. 지금의 사립 초등학교라 할 수 있지만 수업료는 없었습니다.


서당에는 지금의 선생님과 같은 훈장이 있었는데,


마을에서 공부를 많이 한 선비나 직업적으로 돌아다니며 지식을 전파하는 선비들이 훈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서당에서는 어떤 책으로 공부했을까요? 우선 《천자문(千字文)》 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끝내면 ‘책걸이’라는 간소한 잔치를 했대. 천자문이 끝나면 《동몽선습》, 《명심보감》, 《사서삼경》 등을 배웠는데,


이 과정을 마치면 대개 15~16세가 되어 서당을 졸업할 수 있었어요.



서당을 졸업해도 공부는 끝이 없는데,


서당을 졸업하면 지방 학생은 향교(鄕校)로, 서울 학생은 사부학당(四部學堂)으로 진학했습니다.



향교는 나라에서 지방에 설립한 중등 학교로, 수령과 관찰사가 향교에서의 교육 활동을 평가했습니다.


수령은 학생의 하루 일과와 성적을 매월 말에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시험을 치르게 하여 학생을 평가함과 동시에 선생님들의 근무도 평가했지요.


향교의 입학 자격은 양반의 자제 또는 향리로, 16세 이상이어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지방에서는 사립 중·고등학교인 서원이 생겼는데,


여기에서 과거 합격자가 더 많아지자 서원은 향교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지요.



한편, 서울에 설립된 사부학당은 향교와 비슷한 내용을 교육했습니다.


향교와 다른 점은 사부학당의 학생들은 5일마다 시험을 치렀으며, 매달 시험도 보았고,


일 년 동안의 성적이 왕에게까지 보고되었다는 점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방학이 있었나요?


우리가 다니는 학교에는 여름과 겨울에 방학이 있지요?


그리고 방학 동안 우린 신나고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 조선 시대에도 방학이 있었을까요?


지금의 초등학교인 ‘서당’은 방학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이 되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주로 시를 읽으며 휴식을 취했다고 합니다.



대학교라 할 수 있는 성균관에도 방학은 없었어요.


성균관 학생들은 기숙사에 머물렀는데, 학교 규칙에 따라 매월 8일과 23일에 집으로 돌아가 옷을 세탁할 수 있는 휴일 정도만 있었지요.


이처럼 따로 방학은 없었지만 사정에 맞게 휴식을 취할 수는 있었다고 합니다.



과거 제도 - 출세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조선 시대의 시험 제도


조선에서는 관리가 되려면 반드시 과거 시험을 거쳐야 했어요.


과거 시험은 천민을 제외하고 누구나 볼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반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통로가 되었지요.


과거 시험은 크게 문관을 뽑는 문과, 무관을 뽑는 무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로 나뉘어 있었는데,


고급 관료가 되어 출세하기 위해서는 문과를 보아야 했습니다.



문과 시험은 소과(小科)와 대과(大科) 2단계로 진행되었어요.


먼저 소과는 유교 경전의 이해도를 알아보는 생원과와 시와 산문 등 문장력을 시험하는 진사과로 나뉘었지요.


또 소과는 각각 자기 고향에서 한 번(초시), 초시 합격자들을 한양으로 불러서 보는 공개 시험(복시)까지 2번의 시험을 통해 가렸습니다.


소과 시험에 최종 합격한 사람은 합격증을 받고, 본인이 희망할 경우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지요.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곳, 성균관


한편 성균관은 조선 시대 최고의 교육 기관이자 나라의 큰 의례를 치르는 장소로, 입학 정원은 소과 복시에 합격한 200명이었지요.


이들은 모두 장학생이 되어 학비와 숙식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고,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동그라미인 원점(圓點)을 받았는데,


이 원점이 300점이 넘어야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대과는 모두 3번의 시험을 치르는데, 첫 번째 시험(초시)에서 200명을 뽑고, 그중에서 최종 합격자 33명을 선발했습니다(복시).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시험(전시)은 임금님 앞에서 합격자의 순위를 매기는 시험으로, 임금님이 최종 합격자를 결정했지요.


바로 여기에서 1등을 하는 것을 장원 급제라고 합니다.



장원 급제한 사람에게는 합격증과 어사화를 주었는데, 이것은 곧 가문의 영광이었어요.


장원 급제자는 어사화를 쓴 채 말을 타고 3일 동안 풍악을 울리는 축하 행진을 벌였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일생을 걸었지만 그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어요.



과거 시험은 경쟁이 치열해 부정 행위가 자주 일어났어요.


커닝페이퍼를 콧속이나 붓대에 숨기기도 했고, 시험관에게 뇌물을 주거나, 남의 답 베끼기, 대리 시험 보기 등 수법도 다양하고 치밀했다고 합니다.


부정 행위를 했을 경우에는 3~6년간 시험을 볼 수 없게 했고,


특히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몰래 보다 들키면 곤장 100대와 징역 3년의 큰 벌을 주었지요.



‘관광’이 과거보러 가는 것이었다면서요?


TV나 책 속에서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메고 한양으로 향하는 선비들의 모습을 본 적 있지요?


그들은 과거가 개인과 가문에 영광을 주는 지름길이라 생각해서


당시에는 과거보러 가는 것을 ‘영광을 보러간다.’라는 뜻의 ‘관광(觀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멀고도 험하게 느껴졌던 과거길이 오늘날에는 여행을 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지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