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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양반] 문반 + 무반 = 양반

by 제이노엘 2017.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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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 입니다.



이양반아 저양반아 하는 그 양반


반찬으로도 있는 그 김에 들어가는 양반


양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양반이란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합쳐서 부르는 말입니다.




양반 제도 - 조선에는 어떤 신분이 있었을까?


부모님의 신분이 나의 신분을 결정했던 조선


TV에서 사극을 보면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마나 나귀 위에서 여유 있는 모습으로 인사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걸 보면서 조선 시대의 신분 제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분이 뭘까?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어떤 신분이 있었을까? 


신분이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개인의 사회적인 위치를 말합니다. 


지금이야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면 내가 원하는 신분이 될 수 있지만 


옛날에는 타고난 신분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기 어려웠습니다.



원래 조선에서 백성의 신분은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양인 중에서도 양반, 중인, 상민의 구분이 생기면서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4신분이 자리 잡게 되었지요. 


사람들은 타고난 신분에 따라 특권을 누리거나 차별을 받으며 살았어. 또한 신분에 따라 권리와 의무도 모두 달랐습니다.





생활상 - 신분별로 생활 모습은 어떻게 다를까?


양반은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 우리가 ‘양반’이라고 하면 중앙의 높은 관료에서부터 


향촌의 시골 양반에 이르기까지 꽤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원래 양반은 나랏일을 담당하는 문반과 무반을 합쳐 부르는 말이었지요. 


그러나 차츰 양반 제도가 자리 잡으면서 그 가족과 가문까지도 양반이라 부르게 되었고, 조선의 지배 계층이 되었습니다.



양반들은 일생 동안 일을 하지 않고 사서삼경과 같은 유교 경전을 공부했고,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나랏일에 참여했습니다. 


관리가 되지 않은 양반들은 유교 경전을 공부하거나 글쓰기, 활쏘기 등을 하였고, 


정자에서 풍류를 즐기기도 했지요. 그리고 양반 여자들은 주로 수를 놓거나 바느질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반에게는 세금이 면제되는 등 많은 혜택이 주어졌지요. 


양반은 그러한 특권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이 평민, 천민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집안별로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상의 가문과 혈통을 중시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양반들은 어떤 집에서 살았을까요? 


부유한 양반들은 기와집에서 살았습니다. 


기와집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분되는데, 안채에서는 안방마님이 살았고, 


사랑채에서는 양반 나리가 거주했으며, 행랑채에서는 주로 노비들이 살았습니다.




중인이란 무얼 하는 사람들이었을까?


중인은 양반과 상민 사이에 있는 중간 계층으로, 


한양과 지방에 있는 관청에서 일하는 서리와 향리, 의술이 뛰어난 의관, 


외국어에 재주가 있는 역관 등이 모두 중인 신분이었습니다. 


중인은 같은 신분끼리 결혼하고, 관청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다고 합니다.



중인은 양반에게서 멸시와 하대를 받았지만, 


대부분 전문 기술이나 행정의 실무를 맡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역관은 사신을 수행하면서 무역에 관여하여 큰 부자가 되기도 했고,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면서 위세를 부리기도 했지요.



또한 중인 중에는 양반의 첩에게서 태어난 서얼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양반이어도 어머니의 지위에 따라 양반 출신의 본부인 자식은 적자로, 


첩의 자식은 서얼로 구분했지요. 


서얼은 문과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관직에 나가도 일정한 관품 이상은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혹시 《홍길동전》을 읽어 보았습니까?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원통함을 탄식하는 부분에서 서얼의 처지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조선 시대의 보통 사람들, 상민


상민은 평민, 양민으로도 불리었으며,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상민은 농업, 수공업, 상업 등에 종사했는데,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 가장 많았습니다. 


특히 농민은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군대에 가는 등 나라를 유지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농민은 가난했습니다.



농사지을 땅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매우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민들은 넓은 토지를 가지고 있는 땅 주인(주로 양반)에게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농민들은 교육 받을 기회가 드물었고, 벼슬을 할 수 있는 길도 거의 막혀 있었습니다. 


또 농민의 아내는 농사일을 돕고 틈틈이 길쌈으로 옷감을 짜서 생활을 도와야만 했지요. 


이와 같이 농민들의 삶은 항상 고단한 나날이었습니다.



상인과 수공업자도 상민입니다. 


이들은 국가의 통제를 받았지요. 


상인은 두 부류를 포함하고 있는데, 서울의 시전에서 관청과 백성의 필수품을 판매하는 시전 상인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수공업 제품이나 생활필수품을 파는 보부상을 합쳐 상인이라고 했지요. 


이들은 상업 활동을 하는 대가로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대주거나 나랏일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상민 중에는 수공업자도 있었는데, 서울과 지방의 관청에 소속되어 필요한 물품을 생산했습니다.



한편, 양인 중에도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 불리는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은 양인의 신분이지만 천하고 아주 힘든 일을 담당하는 계층이었지요. 


주로 수군(水軍), 관청의 잡역을 담당하는 조례, 형사 업무를 담당하는 나장, 


봉수 업무를 맡은 봉수군, 조운 업무를 맡는 조졸, 역졸 등을 말해합니다.




어떤 사람들을 천민이라고 불렀을까?


조선 시대에 ‘종’이라 불리는 노비들과 당시 사람들이 


천하게 여겼던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은 천민이었어. 


천민에는 소나 말을 도살하는 백정, 줄타기 등 묘기를 부리면서 먹고 사는 광대, 


굿판을 벌이거나 운세를 봐 주는 무당, 관원의 술 시중 등을 맡는 기생들이 있었지요.



천민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은 노비였습니다. 


노비란 남자 종 노(奴)와 여자 종 비(婢)를 함께 부르는 말입니다. 


노비는 주인(주로 양반)의 판단에 따라 사고팔 수 있으며, 


상속, 양도, 증여가 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노비는 주인의 재산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양반들은 한 명의 노비라도 늘리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노비와 양인을 결혼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자기 노비로 삼아 재산을 늘리려 했던 거지요.



그럼 노비는 무슨 일을 했을까? 


노비는 국가에 속한 공노비와 개인이 부리는 사노비가 있었습니다. 


사노비에는 주인집에서 함께 사는 솔거 노비와 주인과 떨어져 독립된 가옥에서 사는 외거 노비가 있었지요.



솔거 노비는 주인과 함께 살며 주인의 땅에 농사짓거나, 


주인이 필요로 하는 온갖 허드렛일을 했으며, 


유모 노릇, 편지를 가지고 다니며 각처에 소식을 전하는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등 바쁘게 일했습니다. 


주인과 떨어져 사는 외거 노비 중에는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그 대가로 일정량의 재물을 바쳤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여악과 의침 때문에 관청에 기생을 두었다고 합니다. 


여악이란 춤, 노래로 나라나 관청에서 열리는 연회나 행사에서 흥을 돋우는 일을 말합니다. 


관청의 기생은 의술을 돕거나 침을 놓는 의침(醫針)도 담당했지요. 


그래서 조선의 관기는 의녀(醫女)이자 노래, 춤, 악기도 다루는 다재다능한 여자였습니다.




왜 우리는 모두 양반의 자손일까?


요즘 우리들은 모두가 양반의 자손이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조선 초기에 양반은 전체 인구의 3~4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두가 양반의 자손이 되었을까요? 


조선 후기에는 양반들 중 일부만이 관직을 차지하고, 대부분의 양반은 몰락했습니다. 


몰락한 양반들은 먹고 살기 위해 평민이나 천민들에게 관직 또는 족보를 팔았습니다.



또 재정이 부족해진 나라에서도 돈이나 물건을 바치면 관직을 주거나 신분을 해방시켜 주었지요. 


뿐만 아니라 명예직이 씌어 있는 임명장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관직을 사고팔거나, 족보를 가짜로 만드는 방법을 통해 


양반의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너도나도 양반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옛날에도 시장이 있었나요?


물론 있었지요. 


통일 신라 시대에 경주에는 동시·서시·남시 등의 상설 시장(매일 문을 여는 시장)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행상(行商)과 해상(海商)이 운반한 물자를 국가의 허가를 받은 시전 상인이 사들여 개성에서 팔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전기까지만 해도 상업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육의전(六矣廛)과 시전(市廛)이 있었는데, 


이들은 나라로부터 자신들이 파는 물품을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팔지 못하게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인 ‘금난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신 나라에서는 상인들에게 세금을 부담시켜 국가 재정을 확보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 정조 임금님은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특권을 없애 버렸습니다. 


이후 상공업이 활발해졌지요.




백정들은 모두 가축 잡는 일을 했나요?


일반적으로 ‘백정’하면 소와 돼지를 잡는 사람을 떠올리지요? 


하지만 백정이 그런 일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물건을 전문적으로 만들어 파는 백정도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고리백정’이야. 고리백정은 바구니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또 소가죽으로 신발 따위를 만들어 팔던 백정도 있었는데, 이들을 ‘갖바치’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갖’은 가죽이라는 뜻이고, ‘바치’는 장인이라는 뜻입니다.



또 사람들은 인간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을 백정에게 시키기도 했는데 바로 사형수의 목을 베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던 사람을 ‘회자수’ 또는 ‘망나니’라고 했습니다. 


고리백정이나 갖바치는 지금으로 치면 전문 직업인데, 


이처럼 힘든 일을 하고도 천대받았으니 백정들은 참 불쌍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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