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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대외 관계] 영토를 넓히고 국방을 튼튼히 했어

by 제이노엘 2017.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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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 입니다.



대외 관계에 대해 알아봅시다.


대외(對外) 관계 : 다른 나라에 대한 외교 정책. 조선의 기본적인 외교 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隣)입니다.




우리나라 땅을 호랑이에 비유하여 용맹스러운 기상을 표현한 지도를 본 적 있습니까?


압록강에서 두만강을 포함한 백두산 근처를 호랑이의 머리 부분으로 표현하여,


중국 대륙을 향해 호령하는 힘찬 호랑이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어때, 우리 조상들의 기상이 느껴지지요?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나라의 영토가 이런 모습이었을까요?






명과의 관계 - 실리 외교를 추구



조선은 명나라와 어떻게 지냈을까요?


조선의 기본적인 외교 정책은 사대교린입니다. 


사대(事大)는 중국과 같은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교린(交隣)은 일본, 여진 및 이웃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 


국가의 안정을 꾀한다는 조선 개국 이래의 외교 방침이입니다.



특히 중국(당시 명나라)은 정치, 군사적 대국이자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었습니다. 


또 조선의 정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종주국일 뿐 아니라 과학 기술을 비롯한 문화적 선진국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은 개국 초부터 정기적으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인삼, 모피, 모시, 화문석 등 조선의 특산물을 조공품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왜 명나라에 조공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명나라가 조공 무역만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선은 선진 문물을 얻기 위해서라도 사대의 예를 갖춰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명나라에서도 조선에 비단, 약재, 서적, 도자기 등을 답례품으로 주었습니다.



또한 이때 두 나라 신하들은 서로 한문으로 필담을 나누며 문화적 교류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중국에게 사대의 예를 행했던 겁니다.





조공이란?



조공이란 속국이나 힘이 약한 신하가 종주국에 물건을 바치는 겁니다. 


이는 강대국으로 군림했던 중국 왕조가 주변의 약소 국가에게 행한 대외 정책이었습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순서가 국가 순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로 앞자리에 서려고 다투기도 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중국에 조공 외교를 했는데, 


이는 강요보다는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외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명나라는 조공 외에는 외국과의 어떤 무역도 허락하지 않아서, 


조선에서는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문물을 교환했습니다.





일본, 여진과의 관계 - 이웃과 사귀며 안정을 꾀하다



조선은 북쪽에 있는 여진과 어떻게 지냈을까?



앞에서 교린이 이웃 나라와 대등하게 사귀는 거라고 했지요? 


그런데 조선은 이웃 나라에 항상 너그럽게 대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필요할 때는 강경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조선은 동북쪽과 서북쪽의 국경선 안을 제대로 지키고, 


더 바깥으로 나아가 농지를 넓히기 위해 여러 가지로 애썼습니다. 


조선 왕조의 이런 의지가 담긴 것을 북진 정책이라고 합니다.



북진 정책을 성공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북쪽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을 잘 달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걸 회유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진족에게 관직, 토지, 주택 등을 주어 조선의 백성이 되게 하거나, 


국경 지방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무역을 하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회유책만으로는 북쪽 지역을 확실하게 안정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여진 정벌을 단행했지요.



특히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를 파견해 


두만강과 압록강 근처에 들어와 살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영토를 넓혔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각 도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개척함으로써 


조선의 영토가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경선이 만들어졌지요.





조선은 일본과 어떻게 지냈을까?



고려 말에는 해안 지역에 많은 피해를 주던 왜구가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대규모 부대를 이루어 침략했습니다. 


한때 개성을 위협할 정도였고, 국가 재정과 농민 생활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지요. 


그래서 조선은 개국 초부터 왜구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습니다.



특히 세종은 1419년 왜구의 소굴을 없애버리기 위해 


이종무를 대장으로 하는 군사를 보내어,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대마도) 섬을 토벌하고, 


제한된 범위에서 일본과 교역을 허용했습니다.



이때 조선은 일본에게 부산포, 염포, 제포 세 곳을 교역 장소로 개방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이곳으로 구리, 황 등을 가져와 


곡물, 옷감, 서적 등과 바꾸어 가며 활발한 무역 활동을 했지요. 


또 일본인들은 왜관을 설치하고 거주하기도 했는데, 


왜관이란 조선의 재팬타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3포 안에는 왜관의 대표가 살며 현재의 무역 센터에 해당하는 관수가(館守家), 


일본측 관리가 묵던 재판가(裁判家)를 비롯하여 수백 호에 이르는 민가와 상권이 만들어졌지요.



그 결과 3포는 일본인뿐 아니라 베트남 상인들도 드나드는 국제 무역항이 되어, 


상품의 교역은 물론 문화와 사상을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포구 안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온천 시설도 있었는데, 최고의 인기 장소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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