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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책

[제이노엘]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천하의 중심이 된 고구려

by 제이노엘 2016.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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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이노엘입니다.


만주벌판을 달리신 분을 알고 계십니까?


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 기억하시죠?


오늘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합시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두분은 부자 지간입니다. 아빠와 아들이죠.



광개토대왕

 - 고구려 19대왕(374-413), 재위(391-413) 이름은 담덕

 - 남북으로 영토를 크게 넓혀 만주와 한강 이북을 차지함


장수왕

 - 고구려 20대왕(394-491), 재위(413-491) 이름은 거련, 혹은 연

 - 광개토대왕의 맏아들로 427년에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고 남진 정책을 펼침




고구려의 영토 확장 (고구려의 전성기, 동북아시아 최강국)


고구려는 5세기가 우리나라 중부지방을 꿀꺽 먹습니다. 물론 북으로는 요동을 포함한 만주벌판도 꿀꺽 삼킵니다.

중부지방을 다 먹었기 때문에 현재 충청, 전라 지역 즈음에 자리 잡은 백제는 두려움에 벌벌 떨게 되었지요.

물론 이때는 신라도 약골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의 삼국 시대는 고구려의 전성기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설을 만든 분이 광개토대왕입니다. 18세의 고딩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중국도 많이 먹고, 백제와 신라도 긴장 시키며

신라에 쳐온 일본놈들도 쳤던 분이 광개토대왕입니다. 멋지지요? 우리도 이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광개토 대왕릉비에 새겨진 내용도 한번 봅시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 아들인 장수왕이 만들었는데요, 비문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는 백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떻게 아느냐? 신라는 기냥 신라로 표현되어 있지만, 백제는 백제가 아닌 백잔으로 이름을 낮춰서 기록이 되어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신라와는 또 사이가 좋았다!!!

어떻게 아느냐?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광개토대왕은 5만의 군사를 보내 낙동강에서 왜군을 대신 쳐줬다는 기록이 되어있다고 합니다.

또한 신라시대 무덤인 호우종에서 뚜껑에 달린 청동이 발견되었는데 여기 밑바닥에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415년에 만들었다는 기록도 나왔다 하더라구요.


이당시는 고구려랑 신라랑은 친했는데.... ㅜㅜ





장수왕은 얼마나 오래 살았길래 장수왕이라는 칭호가 붙었을까요?


장수왕은 일단 이당시 100세 시대를 산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기록에서는 98세에 생을 마감하셨다하고, 중국측 기록에는 100세시대를 살고 생을 마감하셨다는 기록이 있지요.

삼국사기에는 79년간 고구려를 다스렸다고 하니 정말 오래살은 인물인 것은 확실합니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


광개토대왕 뒤를 이은 장수왕은 나라를 잘 다스렸지요. 예로부터 국사 시간에 배웠던 말 중에, 땅따먹기 잘하는 왕은 광개토대왕이고, 그의 아들 장수왕은 그 땅을 잘 다스려 발전시켰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들어봤을 겁니다. 위인전도 많이 읽었으니 외우기도 쉬웠지요 우리에게는.

아무튼 장수왕은 중국과 관계를 유지하며, 이제 남쪽을 좀 정벌하려는 마음을 갖고, 427년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중국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쳐도 당장 못칠 상대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예 남쪽을 털어버려 화근을 없애 버린 후 북으로 나아가면 나아가자고 생각을 했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수도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기는데 이를 남진정책이라고 합니다.

또, 평양은 고조선부터 발전된 동네였고, 아무래도 북쪽보다야 더 따뜻하고 먹을것도 많고, 살기 좋은 동네라 이사를 갔겠지요.


그 이후 475년에 3만의 군사를 보내 백제를 더 눌러버리고 한강을 먹고 고구려 백제 신라 라는 말이 나올 만큼 넘버원 고구려를 키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충주에 중원 고구려비도 세웠구요.






저 땅을 좀 보시죠 넓죠? 고구려의 전성기 입니다.





남한에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중원 고구려비 입니다.



중국의 북위에서 여러 나라 외교 사신을 대접할 때, 특히 고구려 사신을 호화찬란하게 대접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왜그랬겠습니까? 우리 광개토대왕이 무섭고 두려운 나머지 고구려를 잘 모시려 했던 것이었겠지요. 

특히나 고구려는 대왕으로 왕을 부르는 호칭을 썼다는데, 광개토대왕만큼은 대왕보다 더 높은 태왕 혹은 성왕으로 불렀다고도 합니다.

게다가, 중국을 따라하지 않고, 고구려 자체의 "영락" 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고구려의 자주의식을 높혔습니다.

고구려가 세계의 중심이다! 라고 외치는 시대의 산 증인입니다.



고구려의 생각 = 천하 의식

고구려의 연호 = 영락

고구려의 외교 = 백제는 백잔, 신라는 속국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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